|
이선식 시인 / 나들에게 보내는 안부
산이 강여울에 주둥이를 처박고 제 안에 깃든 배고픈 목숨들을 위해 밥을 먹고 있다
초점 잃은 동공 속으로 풍경이 고인다 곧 어제가 될 시간들이 마지막 밥을 먹고 있다 단맛을 빨고 순해진 혀처럼 나를 부드럽게 핥고 있다
학교 갈 때 동구 밖까지 따라오다 멈춰 서서 오래도록 바라보던 개라든가 새끼들을 숲속에 숨겨두고 탁발을 나왔던 노루의 모습은 왜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가 내 슬픈 눈빛의 연원에 대해 생각한다
괴테가 돼지고기를 먹으면 그 돼지가 괴테가 되는 거*라는 문장의 발명은 인간의 생명취식에 대한 죄책감을 종의 이동으로 승화시켰다
나무속에는 나무가 살고 돼지 속에는 돼지가 살고 내 안에는 나들이 산다
작은 걸음들을 모아 길이 되어 어디론가 가는 우리, 사소한 바람 한 점도 벽돌 한 장씩 보탰구나 미추와 귀천 없이 누군가의 체온이 되어주고 여정을 마감하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자면 이 저녁의 적막은 내 안으로 거처를 옮긴 슬픔의 침묵이라는 생각이 든다
눈(目) 밖에서 펼쳐지는 향연을 내다보고 있는 눈은 숲속 어둠 뒤에서 인간의 거동을 숨죽여 살피던 눈인지도 모른다
이윽고 산은 바다가 되고 땅은 하늘이 되었다
나들의 총화인 나, 나들에게 한 번이라도 참배한 적 있었던가 이 생에 할일이 있다면 나들의 체온으로 사랑을 모셔 후생을 남김없이 살아주는 일
이 길은 언젠가 달려본 길이다 잠든 사이 뒷덜미엔 자유의 갈기가 자라고 야생의 본능들이 깨어나 종의 국경 너머까지 달려갔다 오는지 꿈에서 깨면 발바닥이 뜨겁다
바람의 결이 익숙하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내 안의 신(神)들이 깨어나고 있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돌의 정원』에서 인용
웹진 『시인광장』 2020년 3월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박서영 시인 / 좋은 구름 (0) | 2020.07.29 |
|---|---|
| 강경호 시인 / 박하 (0) | 2020.07.29 |
| 김밝은 시인 / 외계인 손 증후군* (0) | 2020.07.29 |
| 곽재구 시인 / 봄 외 4편 (0) | 2020.07.29 |
| 황금찬 시인 / 사랑의 눈 외 4편 (0) | 2020.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