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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곽재구 시인 / 봄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29.

곽재구 시인 / 봄

 

 

다시 그리움은 일어

봄바람이 새 꽃가지를 흔들 것이다

흙바람이 일어 가슴의 큰 슬픔도

꽃잎처럼 바람에 묻힐 것이다

진달래 꽃 편지 무더기 써갈긴 산언덕 너머

잊혀진 누군가의 돌무덤가에도

이슬 맺힌 들메 꽃 한 송이 피어날 것이다

웃통을 드러낸 아낙들이 강물에 머리를 감고

오월이면 머리에 꽂을 한 송이의

창포 꽃을 생각할 것이다

강물 새에 섧게 드러난 징검다리를 밟고

언젠가 돌아온다던 임 생각이 깊어질 것이다

보리 꽃이 만발하고

마 가는 가시내들의 젖가슴이 부풀어

이 땅 위에 그리움의 단내가 물결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곁을 떠나가 주렴 절망이여

징검다리 선들선들 밟고 오는 봄바람 속에

오늘은 잊혀진 봄 슬픔 되살아난다

바지게 가득 떨어진 꽃잎 지고

쉬엄쉬엄 돌무덤을 넘는 봄.

 

 


 

 

곽재구 시인 / 산에 꽃피면

 

 

산에

꽃피면

 

봄 산에

꽃피면

 

내 사랑은

내 사랑이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시냇물이 흐르면

시냇물이 흐르는 대로

 

내 조국은

내 조국이다.

 

 


 

 

곽재구 시인 / 새

 

 

라일락꽃 향기처럼

아름다운 추억이 늘 내 가슴속에

숨쉴 수 있기를

라일락꽃 향기처럼

아름다운 고통이 늘 내 가슴속에 빛날 수 있기를

 

해 저무는 날

새 한 마리

내 삶의 여울목에

뜨거운 노래 한 섬 부리고 갑니다.

 

 


 

 

곽재구 시인 / 새벽을 위하여

 

 

잠들다 포근하여 깨어보면

당신은 늙고 해진 입술로 내 이마 위에

새벽의 젖은 꽃무늬를 새겨지지만

어머니 이 고요한 당신의 입맞춤보다 깊게

나를 껴안을 어둠의 큰 그리움을 불러 세울 수 있다면

그 새벽녘엔 아들의 깊은 잠을 깨워줘요

그 새벽녘에 기다렸던 길을 뜰 거예요

칡흑의 깊은 어둠과

돌절벽 끝 부서지는 강물소리를 거슬러

한 사람씩 누군가를 암장하던

자갈밭의 삽질소리를 거슬러

어머니 당신의 입맞춤이 내게 속삭여준

길고 긴 기다림의 새벽나라를 위해

봄과 겨울, 죽음과 사랑의 헛된 영화를 버리고

진창이거나 가시밭길이거나

눈길이거나 뜨거운 유황불길 속이라도

숨막힌 아카시아 꽃길을 가듯 걸어가겠어요

꽃 지는 날엔 어둠이 다시 들고

바람 부는 날 찾아오는 두려움이 더 깊겠지만

어머니 당신의 큰 그리움이

내 가슴에 새겨준 그 새벽녘엔

아직은 보이지 않는 그 날의 큰 새벽을 위해

삼 십 년 하루도 거른 일 없는

당신의 깊고 고요한 입맞춤을 떠나겠어요

 

 


 

 

곽재구 시인 / 서울 세노야

 

 

오 년만의 연락에도

시 쓰는 동무들 모이지 않아

깊게 술 마신 밤

어기어차 노 저어 상도동 산 1번지

강형철네 포구로 간다

휘몰이 밤 물길 젓고 또 저어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마지막 물굽이

자주달개비 꽃 빼어 닮은 형철이 각시는

술살 보러 새로 두시 밤 물길 눈 비비며 가는데

세노야

멸치 잡아 그물 온방내 던져봐도

멸치 꼬랑지만한 금빛 시 한 줄 서울의

가을바다에 걸리지 않고

세노야

달은 떠서 산 넘어 가는데

우리 갈 길 아득하고

 

 


 

곽재구(郭在九) 시인

1954년 전남 광주 출생. 전남대학교 국문과 졸업. 숭실대학교 대학원. 1981년 중앙 일보 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주로 민중의 삶에 대한 애정을 애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을 썼다. 시집으로는 '사평역에서'(1983), '서울 세노야'(1990),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1999) 등이 있다.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제10회 신동엽창작기금. 1996 제9회 '동서문학상'. 1986 계간지 '시와 사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