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구경 시인 / 어둠이 자박자박한 시간에
파릇한 봄날 쑥이 불러서 쑥에게 갔다가 검은 비닐이 얼굴에 두 겹씩이나 들러붙어서 허겁지겁 도망쳐야했던 것처럼 그 귀신같은 비닐만 보면 보는 족족 발로 밟아버렸건만 오늘 집밖에서 누가 자꾸 나를 불러 김창순여사인가 하니 무언가가 이상해 모르는 발소리에 모르는 기척이라 가만히 앉았다가 바로 물러서 가까운 방에 가 숨죽이고 있으니 이것이 한두 놈이 아니라 이제 이걸 어쩌나! 여차 하면 불이란 불은 다 켤 준비하고 휴대폰도 꼭 쥐고 무서워 벌벌 떨고 있었으니 바로 그놈들의 웅성거리는 한복판을 차 소리가 붕붕거리더니 돌아가신 내 엄마 김창순여사도 아니고 도둑들도 아닌 아들이 깜깜한데 불도 안 켜고 뭐 하냐며 문을 두들기는 것이어서 헛기침으로 나아가 살살 찾아보니 바람은 미안한 듯 귀신이 저 검은 비닐봉지에 붙었다고 전깃줄과 나뭇가지와 땅바닥을 가리키고는 슬며시 사라지는 것이니 접시만큼 얼어붙은 얼음에도 꼼짝없이 다리 하나를 잡힌 비닐봉지는 자박자박 걷지도 못하고 그 기운이 다한 듯 엎드려 굽실거리니 어둠이 봄볕 같다고나 할까 여보세요 김창순여사!
웹진 『시인광장』 2012년 1월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록 시인 / 시차 (0) | 2020.07.29 |
|---|---|
| 이미란 시인 / 새들의 이마 위에 씌어지던 서정시 (0) | 2020.07.29 |
| 박서영 시인 / 좋은 구름 (0) | 2020.07.29 |
| 강경호 시인 / 박하 (0) | 2020.07.29 |
| 이선식 시인 / 나들에게 보내는 안부 (0) | 2020.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