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미란 시인 / 새들의 이마 위에 씌어지던 서정시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29.

이미란 시인 / 새들의 이마 위에 씌어지던 서정시

 

 

  나는 또 생각하는 것이다

  영화를 볼 때마다 힘찬 날갯짓으로 솟구치던

  새들의 둥근 이마를

  그 새들이 차고 날아간 해의 심장 위에 씌어지던

  먼 옛날의 서정시를

  이제는 사라진 자막 없는 애국가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닿도록 부르던

  그 시대의 푸른 서슬 같던 낭만을

 

  세월은 흘러 흘러서 어디로 가나

  불빛은 흘러 흘러서 어느 저녁을 서성이나

  밤 깊은 거리엔 헐벗은 시간의 발자국이 흩날리고

  친구를 잃은 사람들의 무거운 외투는

  십이월 간판 밑으로 안개처럼 스며드는데

  한 국자의 뜨거운 애사를 간직하지 못한 우리는

  도망치듯 가방을 메고 손을 흔들며

  가랑잎 같은 택시를 타고

  협궤열차를 닮은 전철을 타고

  마지막 질주의 투명한 버스를 타고

  내일의 안녕을 위해 제 각각의 집으로 사라져간다

 

  새들의 이마 위에 우리는 이제 어떤 시를 써야하나

  그 옛날 영화를 볼 때마다 애국가를 따라 부르며

  가슴 벅차게 의자를 당기던 시절을 뭐라고 불러야 하나

  그 시절의 울분을 달래주던 가난한 낭만의 세월과

  청춘의 자막 뒤로 흘러가버린 눈물 같은 서정시를

  이제는 무엇이라 이름 붙여 불러야 하나

 

웹진 『시인광장』 2012년 1월호 발표

 

 


 

이미란 시인

1962년 강원도 양구에서 출생. 1997년 《학산문학》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준비된 말도 없이 나는 떠났다』(시와시학사, 1999)와 『내 남자의 사랑법』(황금알, 2011)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