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정원숙 시인 / 문채(文彩)들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30.

정원숙 시인 / 문채(文彩)들

 

 

  발바닥이 부르트는 밤이야. 천창(天窓)엔 짐승의 뼈를 닮은 별들이 반짝이는데 발바닥과 손바닥은 침낭 속에 버려져 있지. 잊혀진 유리창에 남겨 놓은 내 입김은 어느 능선의 바람에 볼을 부비고 있나 식물 같은 달 속엔 아기들의 발자국이 아장아장 찍히고 이곳의 낮은 차갑고 밤은 뜨겁기만 해.

 

  달이 질 때까지 잠들지 말아야지.

 

  내가 키우던 고양이의 눈빛처럼 내 문장들은 핏줄 속을 흐르고 있을 테지. 사라진 제 꼬리를 찾아 서툰 몸짓으로 별빛을 채고 있을 테지. 가까운 곳에선 이방인들이 차가운 제祭를 올리는데 지금은 종이도 펜도 없는 밤이야. 이빨에 낀 모래의 치어들이 새끼를 까고 울음을 낳고 또 낳아 사구를 오르기 시작해. 저 사구 뒤에 사는 그리움은 발바닥이 부르트게 달려가도 가까이 품을 수 없는 언어, 이생에서 내가 지을 수 없는 문(文)의 체위 몇 채.

 

  별이 질 때까지 눈 감지 말아야지.

 

  종이를 닮은 사람은 슬픔의 무게를 찬양하지 못하지. 내 손가락과 발가락은 무엇을 위해 무엇을 쫓고 있나 점점 가벼워져가는 책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나 바람이 저지대를 포복할 때마다 우린 지하로만 달리는 기차소리 따라 잠을 빵처럼 부풀리기도 했던가 천창마다 내가 못다 읽은 생의 페이지가 펼쳐지고 그대의 눈은 초록의 샘을 퍼올리는,

 

  저녁을 지나 아침으로 달리는 사슴의 목초지.

 

  그 경계를 넘나드는 내 문장은 뜨겁게 타오르다 쉽게 꺼지는 불꽃의 음지. 아기들의 발자국이 지워지기 전 이방인들의 제가 끝나기 전 이생 위에 지은 문의 체위 몇 채 끌고 부푸는 잠 속을 서둘러 빠져나가야 해. 오랫동안 키우던 식물의 뿌리처럼 내 문장들을 그리움의 뼛속에 이식해야 하므로, 내 자궁 속 달이 잃어버린 제 심연을 찾아 여린 눈빛으로 어둠을 해독하고 있을 것이므로,

 

 태양이 뜰 때까지 눈 뜨지 말아야지.

 

웹진 『시인광장』 2012년 1월호 발표

 

 


 

정원숙 시인

충남 금산에서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창과와 경희사이버대학교 문창과를 졸업. 2004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바람의 서(書)』(천년의시작, 2008)가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이며 강원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 재학 中.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기철 시인 / 헝겊 철학자  (0) 2020.07.30
박세현 시인 / 나는 외롭더라  (0) 2020.07.30
박판식 시인 / 구(口)  (0) 2020.07.30
강영은 시인 / 검시관  (0) 2020.07.30
곽재구 시인 / 성묘 외 4편  (0) 2020.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