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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시인 / 성묘
무릎을 꿇어라 이 못난 후레자식 핏대를 세우며 삿대질을 하며 아버지는 거친 억새풀로 일어나 억새풀 아래 무릅 꿇은 잡풀보다 허름한 자식놈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아들아 니 애비 못나 설운 마음 지천으로 패랭이꽃으로 빈 들판에 널렸는데 너 이제 한 주먹의 허름한 눈물로 불쌍한 애비 앞에 무릎 꿇었느냐 생각해라 잘살기 위해서라면 사군자에 곁들인 채색화도 잘 팔리고 미국 땅 삼류 음대 옆문으로 빠져나와 떡잎 그른 조선 호박잎들 바이올린 레슨 벌 만하고 잘살 일 하나로 죽어 가는 그 길이 가깝다면 너를 보는 애비 두 눈에 피눈물이 맺히리라 아들아, 별이 뜨는 가을밤을 너는 걸었느냐 여름의 진창 섞인 어둠 속을 헤매었느냐 눈을 감아라 겨울은 오고 홀로라도 네가 걸어야 할 길은 멀다 겨울은 오고 네가 맞을 눈송이는 아직 포근하다 돌아가거라 네 가슴에 남은 그리움이 내 가슴의 그리움과 함께 지천으로 피는 날 허름한 내 무덤 쓰러진 억새풀 위에도 뜨거운 이 세상의 송이 눈이 흩날리리라.
곽재구 시인 / 소나기
저물 무렵 소나기를 만난 사람들은 알지 누군가가 고즈넉이 그리워하며 미루나무 아래 않아 다리쉼을 하다가 그때 쏟아지는 소나기를 바라본 사람들은 알지 자신을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걱정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이를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분노라는 것을 그 소나기에 가슴을 적신 사람이라면 알지 자신을 속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속이는 것이 또한 얼마나 쓸쓸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곽재구 시인 / 얼음 풀린 봄 강물 섬진 마을에서
당신이 물안개를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냥 밥 짓는 연기가 좋다고 대답했지요
당신이 산당화꽃이 곱다고 얘기했을 때 나는 수선화꽃이 그립다고 딴말했지요
당신이 얼음 풀린 봄 강물 보고 싶다 말했을 때는 산그늘 쭉 돌아앉아 오리숲 밖 개똥지빠귀 울음소리나 들으라지 했지요
얼음 풀린 봄 강물 마실 나가고 싶었지마는 얼음 풀린 봄 강물 청매화향 물살 따라 푸르겠지만.
곽재구 시인 / 우이도 편지
어무니 가을이 왔는디요 뒤란 치자꽃초롱 흔드는 바람 실할텐디요 바다에는 젖새우들 찔룩찔룩 뛰놀기 시작했구면요 낼모레면 추석인디요 그물코에 수북한 달빛 환장하게 고와서요 헛심 쪼깨 못 쓰고 고만 바다에 빠졌구만요 허리 구부러진 젖새우들 동무 삼아 여섯 물 달빛 속 개구락지헤엄 치는디 오메 이렇게 좋은 세상 있다는 거 첨 알았구만요 어무니 시방도 면소 순사 자전거 앞에 서면 고금쟁이 걸음처럼 가슴이 폴짝 뛰는가요 출장 나온 수협 아재 붙들고 아직도 공판장 벽보판에 내 사진 붙었냐고 해으름까지 우는가요 어무니 추석이 낼 모렌디요 숯막골 다랑치논 산두빛 익어 고울텐디요 호박잎 싼 뜨신 밥 한 그릇 차마 그리운디요 언젠가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 일뿐으로 가막소에 가고 지명수배를 받던 세상 부끄러워 할 날 올 것이구만요 어무니 낼모레면 추석인디요 반월과 구로동 나간 동생들 다 돌아올텐디요 봉당 흙마루 걸터앉아 송편도 빚고 옛이야기 빚노라면 달빛은 하마 어무니 무릎 위에 수북수북 쌓일텐디요.
곽재구 시인 / 유산
잡풀로 서걱거릴 너희를 버히겠다 한 놈 두 놈 새로 태어날 네놈까지 울지 마라 아버지는 백정이 아니었다 비껴서서, 바늘이 없는 길을 골라서서 아버지는 너희들이 편한 풀로 한세상 흔들리는 꼴을 보지 못하겠다 아버지는 백정이 아니었다 도망자였다 보안경을 쓰고 섬광과 함께 치지직 너희 질긴 뿌리를 지지겠다 한세상 서러운 잡풀로 흔들릴 피내림의 단호한 종지부를 찍겠다 그러나 믿어다오 아버지는 도망자가 아니었다 그리운 이 땅의 풀씨만한 새벽에도 희망을 새기는 아버지의 슬픔은 종지부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너희 형제 얼굴이 아니었다 들지 않는 낫날로 모진 너희를 버히면서 아버지의 아픔은 잡풀인 아버지의 부끄러운 한세상 흔들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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