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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구재기 시인 / 길을 가는 데는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2.

구재기 시인 / 길을 가는 데는

 

 

길을 가는 데는

굽이가 있어야 한다

빠른 걸음을 좀더 더디게 할 수 있는

가로질러 갈 걸 돌아갈 수 있는

바로 곁이 아니라

좀더 멀리할 수 있는

더딤이 있어야 한다

 

큰 강을 건너는 데에는

다리가 없어야 한다

먼 건너를 가까웁게, 성큼성큼

너른 물을 좁으막히, 넝큼넝큼

바로 건너가 아니라

아득한 저만큼의 거리가 있어야 한다

 

옛길을 그리워하는 사람아

너와 내가 걷던,

빠른 걸음을 부끄러워 할 때쯤

너와 나는 분명한 이별이었나니

스러졌어도 남아 있어야 할 노래도 없이

먼 길 따라 가쁜 숨결 따라

헉헉헉헉 숨 차 오르는 지름길로 다가서서는

끝내 눈물이었음을 이제는 알겠는가

 

길을 가는 데는 언덕이 있어야 한다

함께 걸어야 할 너와 내가

산길 굽이굽이 함께 올라가야 할

무엇보다도 충분히 걷고 걸어야 할

아무리 길눈이 어두워도 함께, 찾아보기 쉽게

이 세상의 언덕을 넉넉히 챙겨 놓아야 한다

 

 


 

 

구재기 시인 / 꽃샘추위

 

 

꽃밭에 얼굴을 부비며

빈 꽃가지를 흔들며

또 그렇게 지나야 하는 겨울,

그 비바람을 막을 수는 없다.

 

조금씩 조금씩 뒤안길을

보듬어 스스럼 열며

꽃철을 맞아 사위어져 가는……

 

최후의 만찬.

 

 


 

 

구재기 시인 / 내일

 

 

오늘의 바람도

자정을 넘으면

내일로 가댄다

 

겨울 숲은 언제나

눈부시게 부서질

가슴만을 만난다

 

 


 

 

구재기 시인 / 돼지가 웃었다

 

 

살아서는 하늘을 볼 수 없는

돼지는 하늘 한 번 보기가

평생 소원이었는지라

목숨을 버려서야 목욕재계하고

온몸을 뉘인 채

비로소 하늘을 보았다

 

돼지는 입만 슬쩍 벌리고 헤헤헤 웃었다

 

살아생전 웃을 일 전혀 없었던

돼지는 몸통마저 버린 채

머리만으로 높은 상에 올라앉으니

사람들은 저승 갈 노자까지

입에 물려주며

두 손 모아 큰절을 하였다

 

돼지는 소리 없이 크게 흐흐흐 웃어댔다

 

 


 

 

구재기 시인 / 무지개

 

 

하늘이여

나는 이 순간

시인으로 태어나

비로소

언어의 사기꾼이

되고 싶습니다

 

 


 

 

 구재기(丘在期) 시인

호. 신곡(新谷). 1950년 충남 서천에서 출생. 충남대학 교육대학원 졸업.  1978년 《현대시학》에서 시부문 추천 완료(전봉건 시인 추천)로 등단. 고등학교 국어교사. 시집으로 『농업시편』, 『바람꽃』, 『아직도 머언 사람아』, 『삼 십리 둑길』, 『둑길行』, 『 빈손으로 부는 바람』, 『들녘에 부는 바람』, 『정말로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내 가슴 속의 날 지우는 일이다』, 『겨울은 옷을 벗지 않는다』, 『콩밭 빈 자리』, 『千房山체 오르다가』, 『살아갈 이유에 대하여』, 『강물』 등이 있고  제 2회 충남문학상, 충청남도 문화상 문학부문, 제6회 시예술상 수상. 현재 충남시인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