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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재기 시인 / 길을 가는 데는
길을 가는 데는 굽이가 있어야 한다 빠른 걸음을 좀더 더디게 할 수 있는 가로질러 갈 걸 돌아갈 수 있는 바로 곁이 아니라 좀더 멀리할 수 있는 더딤이 있어야 한다
큰 강을 건너는 데에는 다리가 없어야 한다 먼 건너를 가까웁게, 성큼성큼 너른 물을 좁으막히, 넝큼넝큼 바로 건너가 아니라 아득한 저만큼의 거리가 있어야 한다
옛길을 그리워하는 사람아 너와 내가 걷던, 빠른 걸음을 부끄러워 할 때쯤 너와 나는 분명한 이별이었나니 스러졌어도 남아 있어야 할 노래도 없이 먼 길 따라 가쁜 숨결 따라 헉헉헉헉 숨 차 오르는 지름길로 다가서서는 끝내 눈물이었음을 이제는 알겠는가
길을 가는 데는 언덕이 있어야 한다 함께 걸어야 할 너와 내가 산길 굽이굽이 함께 올라가야 할 무엇보다도 충분히 걷고 걸어야 할 아무리 길눈이 어두워도 함께, 찾아보기 쉽게 이 세상의 언덕을 넉넉히 챙겨 놓아야 한다
구재기 시인 / 꽃샘추위
꽃밭에 얼굴을 부비며 빈 꽃가지를 흔들며 또 그렇게 지나야 하는 겨울, 그 비바람을 막을 수는 없다.
조금씩 조금씩 뒤안길을 보듬어 스스럼 열며 꽃철을 맞아 사위어져 가는……
최후의 만찬.
구재기 시인 / 내일
오늘의 바람도 자정을 넘으면 내일로 가댄다
겨울 숲은 언제나 눈부시게 부서질 가슴만을 만난다
구재기 시인 / 돼지가 웃었다
살아서는 하늘을 볼 수 없는 돼지는 하늘 한 번 보기가 평생 소원이었는지라 목숨을 버려서야 목욕재계하고 온몸을 뉘인 채 비로소 하늘을 보았다
돼지는 입만 슬쩍 벌리고 헤헤헤 웃었다
살아생전 웃을 일 전혀 없었던 돼지는 몸통마저 버린 채 머리만으로 높은 상에 올라앉으니 사람들은 저승 갈 노자까지 입에 물려주며 두 손 모아 큰절을 하였다
돼지는 소리 없이 크게 흐흐흐 웃어댔다
구재기 시인 / 무지개
하늘이여 나는 이 순간 시인으로 태어나 비로소 언어의 사기꾼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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