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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노향림 시인 / 종이학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2.

노향림 시인 / 종이학

 

 

우리 아파트 바로 위층엔 신혼 부부가 세들어 삽니다.

원양어선을 타고 결혼식 다음날 떠난 신랑을 기다리는

그녀는 매일 종이학을 날립니다

 

한두 마리 날아 오르다가 수십 마리가 우리집 베란다에

떨어져 죽습니다. 그중 몇 마리는 아직

허공을 날고 있습니다

 

날개 없는 학을 무엇이 날려주는 지 모른채

나도 마주 손 흔들어 줍니다

 

어느덧 그녀의 하늘에서 나는 흔들립니다

종이학이 날아올 때마다 덜컹대는 창문,

새로 돋는 아이비 덩굴손도 흔들립니다

 

허물린 담장 위엔 이승의 보이지 않는

새파란 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매캐한 하늘 속 홀로 있어도

그리움 깊으면 흔들린다는 사실이

황홍해져 또 다시 흔들립니다

 

불현듯 그대에게 날려보낸 학 한 마리는

기다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노향림 시인 / 차마고도

 

 

목이 말라야 닿을 수 있는 길

차마 갈 수 없어도

참아 갈 수 있는 길

그런 하늘 길

생각하며 연필화의

흐릿한 연필 끝을

따라가본 것뿐인데

등 뒤가 까마득한 茶馬古道,

茶 대신 소금 한 줌 얻으려고

연필화 끝의 희미한

멀고 먼 나라

비단길 너머

그 너머

 

 


 

 

노향림 시인 / 추억이 마려운 얼굴

 

 

고속도로 휴계소 간이식당에서

찐 감자 몇봉지를 사들고

그는

추억이 마려운 얼굴로

서 있었습니다

 

하늘은 눈을 찌를 듯 높고

타고 온 트럭은 등 돌려 있습니다

 

지금까지 달려온 길을 잠시 벗어 걸어두고

마구잡이로

시간은 그렇게

사람들의 뒷덜미를 끌고

들어갔다

나옵니다

 

하릴없이 등 돌려 남겨두고 온 하늘에는

비늘구름이 찌르레기새처럼 박혀 있고

깡마른 얼굴로

노을이 중얼거립니다.

 

여기서 늙음까지는 몇리?

 

 


 

 

노향림 시인 / 편지

 

 

가는 해와 오는 해 사이

묵묵히 고개 숙여 수많은 생각을 하고

수많은 행복이 자갈돌들로 깔려서

반짝이며 있는 곳

 

아이들이 무성생식(無性生殖)의 열매 같은 젖멍울을 내어놓은 채

제기차기를 하며 한가하게 놀고 있는

근심 없는 카드 한 장의 빈 터

 

 


 

 

노향림 시인 / 황조롱이 생존법에 관한 관찰

 

 

강변아파트의 비좁은 환기구 앞에서 비는

황조롱이네 집을 가려주고 내린다.

생존을 향한 새들의 이동에 한여름에도

주인은 환풍기를 틀지 않는다.

 

몇 날이고 비는 내려서 먹이를 찾지 못한

어미 새는 장마 속에서 버티다가

허공에 한번 치솟았다가 수직강하 하는 것이

생존법이라고 어렵사리 나는 법을

새끼들에게 가르친다.

 

퍼붓는 빗속에 어미는 허공을 날개 끝에 매달아놓고

앞발을 모으고 고수부지에 사뿐히 내려앉아 보여준다.

배추흰나비와 호랑나비의 찢긴 날개를 찾는 법

이파리에 붙어 떨고 있는 애벌레를 보면

잽싸게 발톱으로 낚아서 솟구치는 법

 

몇 차례 새끼들은 물어다 준 먹이를 물었다.

황조롱이는 다시 날개를 펴 수직강하 한다.

비가 내리는 어둡고 습한 풀숲에는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는 새와 잔영이 남아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는 절체절명의

생존법이 숨어 있다.

 

 


 

노향림 시인

194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출생. 1965년 중앙대 영문과 졸업. 1970년 《월간문학》 시 부문 신인상에 〈불〉 등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K읍 기행』(1977), 『눈이 오지 않는 나라』(1987),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1992),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1998)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2005)  등이 있음.   대한민국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이수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