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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정 시인 / 드로잉
사슴을 잡아먹었어요 허기도 없이 친구들은 모두 뒷다리를 뻗으며 달아났죠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은 용서와 보복의 타란텔라 한 명이 죽고 한 명이 태어나는
당신과 외출을 하고 돌아오면 다리에 엉킨 콜타르가 온 몸을 타고 올라요 보이나요 내가 가진 그림은 이만큼의 액운으로 가득하죠
사막의 캔버스 위에는 황달 걸린 두 개의 눈알과 차이무를 입은 어린 소녀들이 흔적도 없이 살육되는 백색 풍경
한 벌의 곡(哭)을 입어요 쓸모없이 아름다운 점괘와 바람에 누렇게 닳는 부적의 명도(明度) 쓸쓸한 누보로망의 문장을 덧칠하던
소녀의 함몰된 유두 형체를 도려내는 선의 기행(奇行) 사전을 펼치면 아름다운 단어들이 흉측한 단어들에게 잡아먹혀요
죽은 짐승들은 제 눈을 봐달라며 폭죽 같은 울음을 제물로 바치고 가죽이 벗겨진 붉은 소녀들이 텅 빈 구도 속으로 달아나는 휴일
가위에 눌려 눈을 뜨면 내 복부를 관통하던 당신의 뿔 나는 감정도 없이 태어나고 달아나는 낱낱이 지워지는 형체
시작할 수 없는 곳에서 시작되는 회유의 몽타주처럼
다리도 없이 돌아온 친구들이 대낮의 어둠과 손을 맞잡아요 감각의 공소시효가 끝나는 밤 박제된 내가 첫 울음을 터트려요
웹진 『시인광장』 2012년 4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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