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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은정 시인 / 드로잉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3.

박은정 시인 / 드로잉

 

 

  사슴을 잡아먹었어요 허기도 없이

  친구들은 모두 뒷다리를 뻗으며 달아났죠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은

  용서와 보복의 타란텔라

  한 명이 죽고 한 명이 태어나는

 

  당신과 외출을 하고 돌아오면

  다리에 엉킨 콜타르가 온 몸을 타고 올라요

  보이나요 내가 가진 그림은 이만큼의 액운으로 가득하죠  

 

  사막의 캔버스 위에는

  황달 걸린 두 개의 눈알과

  차이무를 입은 어린 소녀들이

  흔적도 없이 살육되는 백색 풍경  

 

  한 벌의 곡(哭)을 입어요

  쓸모없이 아름다운 점괘와

  바람에 누렇게 닳는 부적의 명도(明度)

  쓸쓸한 누보로망의 문장을 덧칠하던   

 

  소녀의 함몰된 유두

  형체를 도려내는 선의 기행(奇行)

  사전을 펼치면 아름다운 단어들이

  흉측한 단어들에게 잡아먹혀요

 

  죽은 짐승들은 제 눈을 봐달라며

  폭죽 같은 울음을 제물로 바치고

  가죽이 벗겨진 붉은 소녀들이

  텅 빈 구도 속으로 달아나는 휴일  

 

  가위에 눌려 눈을 뜨면

  내 복부를 관통하던 당신의 뿔

  나는 감정도 없이 태어나고 달아나는

  낱낱이 지워지는 형체

 

  시작할 수 없는 곳에서 시작되는

  회유의 몽타주처럼

 

  다리도 없이 돌아온 친구들이

  대낮의 어둠과 손을 맞잡아요

  감각의 공소시효가 끝나는 밤

  박제된 내가 첫 울음을 터트려요

 

웹진 『시인광장』 2012년 4월호 발표

 

 


 

박은정 시인

1975년 부산에서 출생. 창원대학교 음악과 졸업. 2011년 《시인세계》 신인상을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