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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혜영 시인 / 마네의 풀밭에서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5.

김혜영 시인 / 마네의 풀밭에서

 

 

마네가 풀밭에 앉아 점심 식사를 한다

부르주아였던 마네는 양복을 입고

친구와 보르도 와인을 마신다

애인은 누드의 포즈로 앉아 있다

 

그녀의 옷을 마네가 벗겼는지

그녀가 스스로 벗었는지

풀밭 가장자리에 선 나무는 안다

 

새해 첫날,

식당 계산대에 앉은 돼지의 코를 본다

바이러스 열병에 걸려

생매장 당한 돼지들의 울음은 어디로 갔나

 

실비아 플래스는 「아빠」란 시에서

남편이었던 테드 휴즈에게

“개새끼!”라고 욕을 퍼붓는다

 

시는 아름다워야 한다는 관념을 부수는 고백시는

미국 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지

내일을 모르는 돼지처럼

우린 마네의 그림을 닮았지

 

살롱전에서 떨어져

낙선전에 그림을 걸었던 마네는 와인을 마신다

매독에 걸린 마네처럼 시는 우울하다

 

오르세 미술관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이 필요해

문학의 아우라는 어디서 오는 걸까

말랑말랑한 언어가 사랑받는 비법인가

 

에밀리 디킨슨은 평생 조명을 받지 못한 채

서랍 안에 시를 차곡차곡 쌓아두었고

실비아 플래스도 인정받지 못한 외로움에 슬펐지

 

고흐는 창녀를 사랑했지

슈만은 정신병동에 입원했었지

타히티 소녀의 알몸을 그리던

고갱도 지독한 매독에 걸렸지

 

푸른 풀밭에 앉은 아름다운 돼지들

뱃살이 뚱뚱해도 괜찮아, 실패해도 괜찮아

버림받아도 넌 아주 소중해

오늘 밤은 평안하게 잠을 자렴

 

계간『애지』 2020년 봄호 발표

 

 


 

김혜영 시인

경남 고성에서 출생. 부산대 영어영문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 1997년 《현대시》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거울은 천 개의 귀를 연다』(천년의시작, 2004),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지혜, 2011)과 평론집 『메두사와 거울』,『분열된 주체와 무의식』 산문집 『아나키스트의 애인』이 있음. 2010년 제8회 애지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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