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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자 시인 / 땅에다 쓴 시
나는 땅바닥에 대고 시를 썼다. 돌짝도 흙덩이 부서진 사금파리도 그대로 찍혀 나오는 울퉁불퉁했던 삶. 삐뚤삐뚤 한글 잠가 나가고 미어진 종이 위에서 연필은 몇 자 못 쓰고 부러졌다. 지금지금 흙 부스러기가 씹혔다. 숨기고 있던 내 부스러기들이 씹혔다.
더 이상 세상에 매달리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땅바닥에 와 있었다. 죽은 꽃잎에 대고 죽은 사과 알에 대고 작은 새의 죽은 눈언저리에 대고 꾹꾹 눌러썼다. 에스겔서의 골짜기 마른 뼈처럼 우두둑 우두둑 무릎 관절 맞추며 붙이며 죽은 것들이 일어섰다. 나는 흙바닥에 대고 시를 쓴다. 죽음도 사랑오 절망도 솟구치며 직혀 나오는 미어지는 종이 위에 꾹꾹 눌러쓴다. 몇 자 못 쓰고 부러지는 연필 끝에 침 대신 두근거리는 피를 바른다. 시에서 늘 비린내가 풍겼다.
최문자 시인 / 못의 도시
쇠와 섞이고 싶은 살이 있다. 더 깊이 찔리고 싶은 상처가 있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싶은 영혼이 있다. 온몸을 찔려도 성이 안 가시는 쾌락이 있다. 서울에선 못이 잘 팔려나간다. 나날이 수요가 급증한다.
최문자 시인 / 믿음에 대하여
그녀는 믿는 버릇이 있다. 금방 날아갈 휘발유 같은 말도 믿는다. 그녀는 낯을 가리지 않고 믿는다. 그녀는 못 믿을 남자도 믿는다. 한 남자가 잘라온 다발 꽃을 믿는다. 꽃다발로 묶인 헛소리를 믿는다. 밑동은 딴 데 두고 대궁으로 걸어오는 반토막짜리 사랑도 믿는다. 고장난 뻐꾸기 시계가 네 시에 정오를 알렸다. 그녀는 뻐꾸기를 믿는다. 뻐꾸기 울음과 정오 사이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녀의 믿음은 지푸라기처럼 따스하다. 먹먹하게 가는귀 먹은 그녀의 믿음 끝에 어떤 것도 들여놓지 못한다.
그녀는 못 뽑힌 구멍투성이다. 믿을 때마다 돋아나는 못, 못들을 껴안아야 돋아나던 믿음. 그녀는 매일 밤 피를 닦으며 잠이 든다.
최문자 시인 / 백지유감
아버지, 흰 종이처럼 살지 못합니다. 섞이고 사무치는 무늬가 없으므로 모든 색깔을 깍아낸벌거숭이 그 몸뗑이 구석구석 알 한 번 낳아본 적 없는 숨을 곳 없는 하양 아버지, 흰 종이는 녹지 못하는 소금입니다. 한번도 멈추지 않고 소금이 되려고 갈수록 캄캄한 세상의 물 속에 깊숙히 가라앉아 본 적도 없는 한 번도 짠맛을 버리지 못하는 흰 종이는 흰빛을 무기처럼 숨기고 밤새 앓는 소리내는 짜디짠 위선입니다. 어느 날 아버지, 부끄럼도 없이 걷잡을 수 없게 살 냄새 풍기면서도 흰 종이처럼 짭짤하게 살고 있다는 제 얘길 들으신다면 아버지, 그건 헛소문입니다. 무서운 헛소문입니다.
최문자 시인 / 빈집
나를 거둬 가는 그대 때문에 나는 빈집이예요. 아주 고요해서 불마저 켜기 싫은 고통의 부위만 남겨놓고 나의 집은 비어 있어요. 당신은 언제나 날카롭게 직립하세요. 내 쪽으로 오는 저 칠흑의 어둠을 안고 내가 쓰러질게요 .질벅한 눈물의 한 부피로 생생하게 쓰러질게요. 다시 살아날까 겁이 나서 혼자 흔들리는 문을 잠그고 살듯이 투명하게 죽을게요.
최문자 시인 / 사과 사이사이 새
나는 사과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었을까 사람의 피가 흐르는 사과였을까 연대조차 알 수 없는 선과 악의 무수한 점들이 찍힌 영혼을 걸친 듯한 계속 사람의 문장을 같이 쓴 흔적이 있는 사과 같은 사람들은 사과 없는 광야를 건넜다
사과 옆은 무서운 난간 난간에서 난간으로 누군가가 위험한 높이까지 새처럼 올라간다 날마다 새로 생긴 사과의 틀린 고백 틀린 허기 틀린 반성 틀린 눈물 틀린 틀린 사과의 밥을 보고 있다 죽어라고 틀리게 태어나서 그 누구의 틀린 기쁨을 맛있게 먹여주던 사과 수프 누군가가 틀린 사과들을 통째로 삼키고 통째로 부서진다 수직으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그 누구의 부서진 어깨뼈 통증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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