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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시인 / 비에 젖은 풀잎을
비에 젖은 풀잎을 밟고 오시는 당신의 맨발 빗소리와 빗소리 사이를 빠져나가는 당신의 나신 종아리에 핏빛 여린 생채기 진다. 가슴팍에 예쁜 핏빛 무늬가 선다.
나태주 시인 / 사는 일이란
아, 오늘도 하루를 무사히 잘 보냈구나 저녁 어스름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며 다시 너를 생각한다
오늘도 잘 냈겠지 생각만으로도 내 가슴은 꽃밭이 되고 너는 제일로 곱고도 예쁜 꽃으로 피어난다
저녁노을이 자전거 바퀴 살에 휘어 감기며 지친 바람이 어깨를 스쳐도 나는 여전히 살아서 숨쉬고 있다는 생각
그 생각만으로도 나는 다시금 꿈을 꾸고 내일을 발돋움하는 사람이 된다 그래 내일도 부디 잘 지내기를 아무 일 없기를
어두워 오는 하늘에도 길가의 나무와 풀에게도 빌어본다 사는 일이란 이렇게얹나 애달프고 가엾은 것이란다.
틀렸다
나태주 시인 / 사랑이여 조그만 사랑이여
가보지 못한 골목들을 그리워 하며 산다. 알지 못한 꽃밭, 꽃밭의 예쁜 꽃들을 꿈꾸면서 산다. 세상 어디엔가 우리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골목길과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던 꽃밭이 숨어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희망적인 일이겠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산다. 세상 어디엔가 우리가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가슴 두근거려지는 일이겠니
나태주 시인 /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사랑한다는 말 차마 건네지 못하고 삽니다 사랑한다는 그 말끝까지 감당할 수 없기 때문
모진 마음 내게 있어도 모진 말 차마 하지 못하고 삽니다 나도 모진 말 남들한테 들으면 오래오래 잊혀지지 않기 때문
외롭고 슬픈 마음 내게 있어도 외롭고 슬프다는 말 차마 하지 못하고 삽니다 외롭고 슬픈 말 남들한테 들으면 나도 덩달아 외롭고 슬퍼지기 때문
사랑하는 마음을 아끼며 삽니다 모진 마음을 달래며 삽니다 될수록 외롭고 슬픈 마음을 숨기며 삽니다.
나태주 시인 / 산행
마음을 비우고 몸을 비우고 당신을 찾아가는 날에 관음보살님, 석련을 꺾어 드신 손이 이쁘고 벗은 발이 이쁘고 이뻐서 혼자만 슬프신 관음보살님,
당신은 벌써 비자나무 숲길에 한 마리 다람쥐 되어 나를 반기고 계셨습니다. 시냇물 되어 도글도글 조약돌을 굴리고 계셨습니다.
머리를 비우고 가슴을 비우고 당신을 찾아가던 날에 관음보살님, 당신은 이미 징검다리 돌길을 건너는 갈래머리 산처녀, 산처녀 되어 나의 앞길을 먼저 가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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