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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나희덕 시인 / 빈 의자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11.

나희덕 시인 / 빈 의자

 

 

나는 침묵의 곁을 지나치곤 했다.

노인은 늘 길가 낡은 의자에 앉아

안경 너머로 무언가 응시하고 있었는데

한편으론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듯했다.

이따금 새들이 내려와

침묵의 모서리를 쪼다가 날아갈 뿐이었다

움직이는 걸 한번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몸 절반에는 아직 피가 돌고 있을 것이다.

축 늘어뜨린 왼손보다

무릎을 짚고 있는 오른손이 그걸 말해준다.

손위에 번져 가는 검버섯을 지켜보듯이

그대로 검버섯으로 세상 구석에 피어난 듯이

자리를 지키며 앉아 있다는 일만이

그가 살아 있다는 필사적인 증거였다.

어느 날 그 침묵이 텅 비워진 자리,

세월이 그의 몸을 빠져나간 후

웅덩이처럼 고여 있는 빈 의자에는

작은 새들조차 날아오지 않았다.

 

 


 

 

나희덕 시인 / 산 속에서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막무가내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

 

산 속에서 밤을 맞아 본 사람은 알리라

그 산에 갇힌 작은 지붕들이

거대한 산줄기보다

얼마나 큰 힘으로 어깨를 감싸주는지

 

먼 곳의 불빛은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나희덕 시인 / 산딸기 익을 무렵

 

 

아기를 들쳐 업은 한 여자의

흙 묻은 발꿈치를 따라 걷다가

나는 보았네

숨어서 익어가는 산딸기를

숨어서 도란거리는 지붕들을

입맞출 수도 없이 낮은 곳에 피어나

잎새 뒤에 숲 뒤에 숨은

작은 마을을

 

등에 업힌 아기가 울고

그 울음에 산딸기 좀더 익으면

땅거미가 내려와 붉은 열매를 감추는 저녁

 

흙 묻은 발꿈치를 따라 걷다가

나는 들었네

산딸기에게 불러주는 자장가를

무사하라 무사하라 부르는 그 노래를

녹슬어가는 함석 지붕 아래서

나는 들었네

 

 


 

 

나희덕 시인 / 살아 있어야 할 이유

 

 

가슴의 피를 조금씩 식게 하고

차가운 손으로 제 가슴을 문질러

온갖 열망과 푸른 고집들 가라앉히며

단 한 순간 타오르다 사라지는 이여

스스로 떠난다는 것이

저리도 눈부시고 환한 일이라고

땅에 뒹굴면서도 말하는 이여

한번은 제 슬픔의 무게에 물들고

붉은 석양에 다시 물들며

저물어가는 그대, 그러나 나는

저물고 싶지를 않습니다

모든 것이 떨어져내리는 시절이라 하지만

푸르죽죽한 빛으로 오그라들면서

이렇게 떨면서라도

내 안의 물기 내어줄 수 없습니다

눅눅한 유월의 독기를 견디며 피어나던

그 여름 때늦은 진달래처럼

 

 


 

 

나희덕 시인 / 새떼

 

 

철새들이 줄을 맞추어 날아가는 것

길을 잃지 않으려 해서가 아닙니다

이미 한몸이어서입니다

티끌 속에 섞여 한계절 펄럭이다 보면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어느새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걷고 있는

저 두 사람

그 말없음의 거리가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새떼가 날아간 하늘 끝

두 사람이 지나간 자리, 그 온기에 젖어

나는 두리번거리다 돌아갑니다

 

몸마다 새겨진 어떤 거리와 속도

새들은 지우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 혹시 길을 잃었다 해도

한 시절이 그들의 가슴 위로 날아갔다 해도

 

 


 

나희덕 시인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그녀에게』, 『파일명 서정시』등과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 접시의 시』 등과 산문집 『반통의 물』, 『저 불빛들을 기억해』,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가 있음.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