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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시인 / 빈 의자
나는 침묵의 곁을 지나치곤 했다. 노인은 늘 길가 낡은 의자에 앉아 안경 너머로 무언가 응시하고 있었는데 한편으론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듯했다. 이따금 새들이 내려와 침묵의 모서리를 쪼다가 날아갈 뿐이었다 움직이는 걸 한번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몸 절반에는 아직 피가 돌고 있을 것이다. 축 늘어뜨린 왼손보다 무릎을 짚고 있는 오른손이 그걸 말해준다. 손위에 번져 가는 검버섯을 지켜보듯이 그대로 검버섯으로 세상 구석에 피어난 듯이 자리를 지키며 앉아 있다는 일만이 그가 살아 있다는 필사적인 증거였다. 어느 날 그 침묵이 텅 비워진 자리, 세월이 그의 몸을 빠져나간 후 웅덩이처럼 고여 있는 빈 의자에는 작은 새들조차 날아오지 않았다.
나희덕 시인 / 산 속에서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막무가내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
산 속에서 밤을 맞아 본 사람은 알리라 그 산에 갇힌 작은 지붕들이 거대한 산줄기보다 얼마나 큰 힘으로 어깨를 감싸주는지
먼 곳의 불빛은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나희덕 시인 / 산딸기 익을 무렵
아기를 들쳐 업은 한 여자의 흙 묻은 발꿈치를 따라 걷다가 나는 보았네 숨어서 익어가는 산딸기를 숨어서 도란거리는 지붕들을 입맞출 수도 없이 낮은 곳에 피어나 잎새 뒤에 숲 뒤에 숨은 작은 마을을
등에 업힌 아기가 울고 그 울음에 산딸기 좀더 익으면 땅거미가 내려와 붉은 열매를 감추는 저녁
흙 묻은 발꿈치를 따라 걷다가 나는 들었네 산딸기에게 불러주는 자장가를 무사하라 무사하라 부르는 그 노래를 녹슬어가는 함석 지붕 아래서 나는 들었네
나희덕 시인 / 살아 있어야 할 이유
가슴의 피를 조금씩 식게 하고 차가운 손으로 제 가슴을 문질러 온갖 열망과 푸른 고집들 가라앉히며 단 한 순간 타오르다 사라지는 이여 스스로 떠난다는 것이 저리도 눈부시고 환한 일이라고 땅에 뒹굴면서도 말하는 이여 한번은 제 슬픔의 무게에 물들고 붉은 석양에 다시 물들며 저물어가는 그대, 그러나 나는 저물고 싶지를 않습니다 모든 것이 떨어져내리는 시절이라 하지만 푸르죽죽한 빛으로 오그라들면서 이렇게 떨면서라도 내 안의 물기 내어줄 수 없습니다 눅눅한 유월의 독기를 견디며 피어나던 그 여름 때늦은 진달래처럼
나희덕 시인 / 새떼
철새들이 줄을 맞추어 날아가는 것 길을 잃지 않으려 해서가 아닙니다 이미 한몸이어서입니다 티끌 속에 섞여 한계절 펄럭이다 보면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어느새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걷고 있는 저 두 사람 그 말없음의 거리가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새떼가 날아간 하늘 끝 두 사람이 지나간 자리, 그 온기에 젖어 나는 두리번거리다 돌아갑니다
몸마다 새겨진 어떤 거리와 속도 새들은 지우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 혹시 길을 잃었다 해도 한 시절이 그들의 가슴 위로 날아갔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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