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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도종환 시인 / 길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11.

도종환 시인 / 길

 

 

아무리 몸부림쳐도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자정을 넘긴 길바닥에 앉아

소주를 마시며 너는 울었지

밑바닥까지 내려가면 다시

올라오는 길밖에 없을 거라는

그따위 상투적인 희망은

가짜라고 절망의 바닥 밑엔 더 깊은

바닥으로 가는 통로밖에

없다고 너는 고개를 가로 저었지

무거워 더 이상 무거워 지탱할 수 없는 한 시대의

깃발과 그 깃발 아래 던졌던 청춘 때문에

너는 독하디 독한 말들로 내 등을 찌르고 있었지

내놓으라고 길을 내놓으라고

앞으로 나아갈 출구가 보이지 않는데

지금 나는 쫓기고 있다고 악을 썼지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희망이 있는 것이라는

나의 간절한 언표들을 갈기갈기 찢어 거리에 팽개쳤지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던지는 모든 발자국이

사실은 길 찾기 그것인데

네가 나에게 던지는 모든 반어들도

실은 네가 아직 희망을 다 꺾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것마저도 너와 우리 모두의 길 찾기인데

돌아오는 길 네가 끝까지 들으려 하지 않던

안타까운 나의 나머지

희망을 주섬주섬 챙겨 돌아오며

나도 내 그림자가 끌고 오는

풀죽은 깃발 때문에 마음 아팠다.

네 말대로 한 시대가

 

그렇기 때문에 가벼워질 수밖에 없다고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도대체 이 혼돈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너는 내 턱밑까지 다가와 나를 다그쳤지만

그래 정말 몇 면이 시 따위로

혁명도 사냥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한올의 실이 피륙이 되고

한 톨의 메마른 씨앗이 들판을 덮던 날의

확실성마저 다 던져버릴 수 없어 나도 울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네 말대로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 네 말대로 무너진 것은

무너진 것이라고 말하기로 한다

그러나 난파의 소용돌이 속으로

그렇게 잠겨갈 수만은 없다.

나는 가겠다 단 한 발짝이라고 반 발짝이라도

 

 


 

 

도종환 시인 / 깊은 물

 

 

물이 깊어야 큰배가 뜬다 얕은 물에는

술잔 하나 뜨지 못한다.

이 저녁 가슴엔 종이배 하나라도 뜨는가

돌아오는 길에도 시간의 물살에 쫓기는 그대는

얕은 물은 잔돌만 만나도 소란스러운데

큰물은 기어서 소리가 없다.

그대 오늘은 또 얼마나 소리치며 흘러갔던가

굽이 많은 이 세상의 시냇가 여울을

 

 


 

 

도종환 시인 / 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피었던 꽃이 어느 새 지고 있습니다.

화사하게 하늘을 수놓았던 꽃들이

지난 밤비에 소리 없이 떨어져

하얗게 땅을 덮었습니다.

꽃 그늘에 붐비던 사람들은 흔적조차 없습니다.

화사한 꽃잎 옆에 몰려오던 사람들은

제각기 화사한 기억 속에 묻혀 돌아가고

아름답던 꽃잎 비에 진 뒤 강가엔

마음 없이 부는 바람만 차갑습니다.

아름답던 시절은 짧고

살아가야 할 날들만 길고 멉니다.

꽃 한 송이 사랑하려거든 그대여

생성과 소멸, 존재와 부재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아름다움만 사랑하지 말고 아름다움 지고 난 뒤의

정적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올해도 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도종환 시인 / 꽃씨를 거두며

 

 

언제나 먼저 지는 몇 개의 꽃들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이슬과 바람에도 서슴없이 잎을 던지는

뒤를 따라 지는 꽃들은 그들을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꽃씨를 거두며

사랑한다는 일은 책임지는 일임을 생각합니다.

사랑한다는 일은 기쁨과 고통, 아름다움과 시듦,

화해로움과 쓸쓸함 그리고 삶과 죽음까지를

책임지는 일이어야 함을 압니다.

시드는 꽃밭 그늘에서

아이들과 함께 꽃씨를 거두어

주먹에 쥐며 이제 기나긴 싸움은

시작되었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고 삶에서 죽음까지를

책임지는 것이

남아있는 우리들의 사랑임을 압니다.

꽃에 대한 씨앗의 사랑임을 압니다.

 

 


 

 

도종환 시인 / 꽃잎

 

 

처음부터 끝까지 외로운 게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지금 내가 외로워서가 아니다.

피었다 저 혼자 지는 오늘 흙에 누운

저 꽃잎 때문도 아니다.

형언할 수 없는 형언 할 수 없는

시작도 아직 못할 곳에서 와서

끝 모르게 흘러가는 존재의 저 외로운 나부낌

아득하고 아득하여

 

 


 

도종환 시인

1954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충북대 국어교육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 1984년《분단시대》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두미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람의 마릉에 꽃이 진다』,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 등이 있고, 산문집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 『그대 가슴에 뜨는 나뭇잎배』,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모과』, 『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 등과 동화 『바다유리』 등이 있음. 1997년 제7회 민족예술상 수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