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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시인 / 언젠가 다시 한번
언젠가 다시 한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번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우리가 지나쳐온, 아직도 어느 갈피에선가 흔들리고 있을 아득한 그 거리들.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그러나 나는 다만 들이키고 들이키는 흉내를 내었을 뿐이다. 그 치욕의 잔 끝없는 나날 죽음 앞에서 한 발 앞으로 한 발 뒤로 끝없는 그 삶의 무도를 다만 흉내내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너를 피해 달아나고 달아나는 흉내를 내고 있다. 어디에도 없는 너를 피해
언젠가 다시 한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번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이 세계의 어느 낯선 모퉁이에서 내가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최승자 시인 / 여성에 관하여
여자들은 저마다의 몸속에 하나씩의 무덤을 갖고 있다. 죽음과 탄생이 땀 흘리는 곳, 어디로인지 떠나기 위하여 모든 인간들이 몸부림치는 영원히 눈먼 항구, 알타미라 동굴처럼 거대한 사원의 폐허처럼 굳어진 죽은 바다처럼 여자들은 누워 있다. 새들의 고향은 거기, 모래바람 부는 여자들의 내부엔 새들이 최초의 알을 까고 나온 탄생의 껍질과 죽음의 잔해가 탄피처럼 가득 쌓여 있다. 모든 것들이 태어나고 또 죽기 위해선 그 폐허의 사원과 굳어진 죽은 바다를 거쳐야만 한다.
최승자 시인 / 외롭지 않기 위하여
외롭지 않기 위하여 밥을 많이 먹습니다 괴롭지 않기 위하여 술을 조금 마십니다 꿈꾸지 않기 위하여 수면제를 삼킵니다. 마지막으로 내 두뇌의 스위치를 끕니다
그러면 온밤내 시계 소리만이 빈 방을 걸어다니죠 그러나 잘 들어 보세요 무심한 부재를 슬퍼하며 내 신발들이 쓰러져 웁니다
최승자 시인 / 중구난방이다
중구난방이다. 한없이 외롭다. 입이 틀어 막혔던 시대보다 더 외롭다.
모든 접속사들이 무의미하다. 논리의 관절들을 삐어버린 접속이 되지 않는 모든 접속사들의 허부적거림. 생존하는 유일한 논리의 관절은 자본뿐.
중구난방이다. 자기 함몰이다. 온 팔 휘저으며 물 속 깊이 빨려 들어가면서 질러대는 비명 소리들로 세상은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없이 외롭다. 신앙촌 지나 해방촌 지나 희망촌 가는 길목에서.
최승자 시인 / 파괴의 집
사방팔방으로 바람, 바람 소리. 바람 파도에 포위된 집, 누울 곳 없는 삼십칠 세.
없는 꿈과 있는 현실, 그 사이에서 바람…… 바람 소리가 날 흔들어댄다.
영원히 뿌리 없는 허공의 방, 허방의 집.
허망하고 허망하여 이 집을 파괴합니다. 이 집을 복원하지 마십시오. 행여, 이 위에 기념 건물을 세우지 마십시오. 명실공히, 이 집은 파괴의 집입니다.
최승자 시인 / 해마다 유월이면
해마다 유월이면 당신 그늘 아래 잠시 쉬었다 가겠습니다.
내일 열겠다고, 내일 열릴 것이라고 하면서 닫고, 또 닫고 또 닫으면서 뒷걸음질 치는 이 진행성 퇴화의 삶,
그 짬과 짬 사이에 해마다 유월에는 당신 그늘 아래 한번 푸근히 누웠다 가겠습니다.
언제나 리허설 없는 개막이엇던 당신의 삶은 눈치 챘었겟지요?
내 삶이 관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오만과 교만의 리허설뿐이라는 것을
오늘도 극장 문은 열리지 않았고 저 혼자 숨어서 하는 리허설뿐이로군요.
그래도 다시 한번 지켜봐 주시겠어요? (l go, l go 나는 간다. (Ego, Ego, 나는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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