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정란 시인 / 수국꽃 피거든
꽃 한 송이가 마음 하나라면 저 많은 작은 꽃들이 모여 한 개의 알처럼 두근거리자면 몇 개의 마음을 주먹밥처럼 뭉쳐야 하는지
환하고 둥그런 저 설레임이 모서리를 자르며 입은 상처들을 꾹꾹 뭉쳐 놓은 것이란 말인지
하나의 마음도 주체하지 못해서 들었다 놓았다, 풀었다 맺었다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변덕을 부리다가, 꽃의 몸을 빌려 빵반죽처럼 부풀어도 되는지
최정란 시인 / 쓴맛이 사는 맛
통이 비었다 쓰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이따금 큰 숟갈로 썼구나 시간이 없는데 식탁을 차려야할 때 급한 불을 끄듯 설탕을 더한다
그때마다 요리를 망친다 손쉬운 달콤함에 기댄 대가다
마음이 허전하고 다급할 때 각설탕 껍질을 벗기듯 손쉬운 위로의 말을 찾는다
내가나를 망치는 줄도 모르고 임시방편의 달콤함에 귀가 썩는 줄도 모르고
생의 시간을 털어 가는 달콤한 약속들은 내 안이 텅 비어 무언가 기댈 것이 필요할 때 정확히 도착한다
내 안에 달콤함을 삼키는 블랙홀이 있다 주의하지 않으면 언젠가 생을 통째로 삼킬 것이다.
최정란 시인 / 애인 구함
대구 발 시외버스 타고 토요일이면 집에 갔다 한껏 볼륨 높인 뽕짝을 들으며 좌석 등받이 뒤편에 애, 인, 구, 함, 볼펜으로 갈겨 쓴 어설픈 춘정 코웃음치던 스무 살 그 때는 몰랐다 사람은 평생 자신의 등뒤에 절실하게 구하는 것 써 붙이고 다니게 되리라는 것, 지울 수 없는 구, 함, 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매달고 다니게 되리라는 것, 가끔 남에게 등 돌리면서 앞선 남의 등을 보고 달리는 동안 멈춰 서서 돌아본 적 없는 뻣뻣한 내 등은 무엇이 필요하다는 구, 함, 을 고함처럼 크게 외치고 있었을까 내려꽂히는 햇살 따갑다
최정란 시인 / 이름
1. 굳이 절약할 생각은 아니지만 나는 그다지 사용하지 않는다 굳이 아껴두어야 할 것도 아닌데다 형체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찾지 않으면 허공 어딘가 떠돈다 쏜살같이 귓전으로 달려오지만 부르는 순간 사라진다 남이 주로 사용하는데, 실은, 아무도 쓰지 않는 날이 더 많다 가끔 혀끝에서 맴돌다 끝물포도 알맹이처럼 터지지만 말라붙은 포도잎이 문패 대신 붙어있을 때도 있다
2. 내 것인줄 알았는데, 본래 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인터넷 검색해보면, 나는 내가 아닐 때가 더 많다 투병중인 환자, 재무재표를 공개중인 회사대표, 푸라하 민박을 예약한 여행객, 슬픈 영화의 주인공, 토피어리 만들기를 가르치는 교수, 플라맹고 강사, 퇴직공무원 빨간 볼링공을 던지는 아가씨, 부당해고를 항의하는 노조원,
적어도 아홉 명의 내가 아닌 내가 제각기 나를 살고 있다 가끔 나는 그 이름에 나를 집어 넣어보기도 하는데 남의 옷에 때 묻히는 게 아닌가 하여 조심스럽다
실은 그들이 나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누구지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조민 시인 / 옥타곤 (0) | 2020.08.16 |
|---|---|
| 정일근 시인 / 가을 부근 외 4편 (0) | 2020.08.16 |
| 최승자 시인 / 언젠가 다시 한번 외 5편 (0) | 2020.08.16 |
| 도종환 시인 / 홀로 있는 밤에 외 3편 (0) | 2020.08.16 |
| 김연종 시인 / 가족의 재구성 (0) | 2020.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