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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시인 / 가을 부근
여름내 열어놓은 뒤란 창문을 닫으려니 열린 창틀에 거미 한 마리 집을 지어 살고 있었습니다 거미에게는 옥수수가 익어가고 호박잎이 무성한 뒤뜰 곁이 명당이었나 봅니다 아직 한낮의 햇살에 더위가 묻어나는 요즘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일이나, 새 집을 마련하는 일도 사람이나 거미나 힘든 때라는 생각이 들어 거미를 쫓아내고 창문을 닫으려다 그냥 돌아서고 맙니다 가을 바람이 불어오면 여름을 보낸 사람의 마음이 깊어지듯 미물에게도 가을은 예감으로 찾아와 저도 맞는 거처를 찾아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정일근 시인 / 가을 억새
때로는 이별하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가스등 켜진 추억의 플랫홈에서 마지막 상행선 열차로 그대를 떠나보내며 눈물 젖은 손수건을 흔들거나 어둠이 묻어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터벅터벅 긴 골목길 돌아가는 그대의 뒷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 없는 시대의 이별이란 코끝이 찡해오는 작별의 악수도 없이 작별의 축축한 별사도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총총총 제 갈 길로 바쁘게 돌아서는 사람들 사랑 없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 이제 누가 이별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겠는가. 이별 뒤의 뜨거운 재회를 기다리겠는가. 하산 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섰는 억새 때로는 억새처럼 손 흔들며 살고 싶은 것이다. 가을 저녁 그대가 흔드는 작별의 흰 손수건에 내 생애 가장 깨끗한 눈물 적시고 싶은 것이다
정일근 시인 / 겨울 새벽에
시인의 아내는 겨울에 눈이 밝아진다
봄여름 가을에는 잘 보지 못했던 곳집이 비는 것이 눈에 환히 보이는 모양이다
새벽 추위에 우리는 함께 잠을 깨 아내는 사위여가는 겨우살이를 헤아리고
나는 시를 생각한다 시인의 가난은 추운 날을 골라서 찾아온다 보일러 기름도 추운 날 새벽을 골라 똑 떨어지듯이
정일근 시인 /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먼바다로 나가 하루 종일 고래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사람의 사랑이 한 마리 고래라는 것을 망망대해에서 검은 일 획 그으며 반짝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지는 고래는 첫사랑처럼 환호하며 찾아왔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처럼 아프게 사라진다 생의 엔진을 모두 끄고 흔들리는 파도 따라 함께 흔들리며 뜨거운 햇살 뜨거운 바다 위에서 떠나간 고래를 다시 기다리는 일은 그 긴 골목길 마지막 외등 한 발자국 물러난 캄캄한 어둠 속에 서서 너를 기다렸던 일 그때 나는 얼마나 너를 열망했던가 온몸이 귀가되어 너의 구둣발 소리 기다렸듯 팽팽한 수평선 걸어 내게로 돌아올 그 소리 다시 기다리는 일인지 모른다 오늘도 고래는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에서부터 푸른 어둠이 내리고 떠나온 점등인의 별로 돌아가며 이제 떠나간 것은 기다리지 않기로 한다 지금 고래가 배의 꼬리를 따라올지라도 네가 울며 내 이름 부르며 따라올지라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사람의 서러운 사랑 바다로 가 한 마리 고래가 되었기에 고래는 기다리는 사람의 사랑 아니라 놓아주어야 하는 바다의 사랑이기에
정일근 시인 / 깨끗한 슬픔
작은 마당 하나 가질 수 있다면 키 작은 목련 한 그루 심고 싶네 그리운 사월 목련이 등불 켜는 밤이 오면 그 등불 아래서 그 시인의 시 읽고 싶네 꽃 피고 지는 슬픔에도 눈물 흘리고 싶네 이 세상 가장 깨끗한 슬픔에 등불 켜고 싶은 봄밤 내 혼에 등불 밝히고 싶은 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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