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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란 시인 / 넥타이
고치 속의 누에처럼 웅크리고 잠든 그 남자 태어난 이후 단 한 번도 생의 중심에 묶인 넥타이 푼 적 없다 벼랑 끝에 매달려 흔들리다가,
때로는 느슨하게 때로는 팽팽하게 목을 조이는 목줄 끝 날개와 맞바꾼 계약의 화살표는 아래로 향한다 참을 수 없이 팽창된 날카로운 한 순간이 뜨거운 절망을 쏘아내고 곤두박질 치면 순한 짐승처럼 늘어지던 넥타이 날아오르려는 순간 번번이 추의 무게에 발목 잡혀
절벽 아래로 수직 강하한다 그는 가끔,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자랑스런 기호 풀고 싶었던 적 없었을까 올가미처럼 조여드는 넥타이 대신 비린 달빛에 입덧하는 늪으로 누워서 한 달에 한 번, 뜨거운 가시연꽃 같은 것 생의 외곽으로 은근히 밀어내고 싶지 않았을까 중심을 가장 가파른 벼랑에 묶어 둔 블랙유머 누구의 매듭을 풀고 나온 넥타이일까 물뱀 한 마리, 수면 위를 미끄러진다
최정란 시인 / 반환 점
어떤 바다거북은 삼십오 년 동안 헤엄쳐 가서 다시 삼십오 년 동안 헤엄쳐 돌아와 생을 끝낸다
떠났다가 돌아오는 단 한 번의 왕복 그것이 일생일 수 있다면 가던 방향을 미련 없이 버리고 돌아서야 하는 반환 점은 대양의 물결 속 어디쯤일까
두께가 나날이 얇아져 가는 지느러미를 추스를 겨를도 없이 어디가 반환점인지, 금지된 수역인지 물빛을 살피지 못하고 파도에 떠밀려 허우적거리다 문득 정신을 차리면 여기가 어디일까, 붉은 해일에 숨이 막힌다
한 번 큰 물결을 타면 멀리, 아주 멀리 가고 싶어 질까봐 아주, 돌아오고 싶지 않을까봐 앞을 막아서는 노을을 물리치며
허겁지겁 서둘러 아침에 떠났던 집으로 백 번도 넘게 돌아오는 저녁
최정란 시인 / 백만 년에 하루쯤
넘쳐 오르는 기쁨을 자제하기 위해 골치 아픈 책을 읽거나 무겁고 진지한 문제에 골몰하는 이상한 날이 있다 백만 년에 하루쯤
오늘 하루만 기뻐하는 것을 용서하면 안 되겠니
백만 년에 하루, 이 드물고 드문 기적 앞에서 왜 머뭇거리는가 환호성 지르며 기뻐하지 못하는가 심지어 가책을 느끼는가
슬픔의 지층 켜켜이 얼어붙은 얼음의 희디흰 동토에 기쁨 한 방울 웃음 한 점 떨어뜨릴까 겁내는가 슬픔의 순수가 훼손될까 겁내는가
백만 년에 온 단 하루를 마음대로 기뻐하지 못하고 기쁨 위에 검은 천을 씌우고 부풀어올라 날아오르려는 기쁨을 누르는 소심한 짐승 이 기쁨이 뿌리깊은 슬픔을 담보로 한 것이 아니기를
암울한 시간을 그토록 오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루쯤 환한 나를 나는 기어코 용서하지 못하는가
최정란 시인 / 보리밭
초록침대가 흔들린다 기름진 푸른 거웃 일렁인다 한바탕 바람이 뒹굴고 간다 황사 자옥한 하늘 진달래 꽃무덤 덮으며 건조주의보가 내린다 산이 구름브래지어를 벗는다 목마른 하늘 앞에 물 오른 젖가슴을 들이민다 푸른 수유의 풍경 사월이 서둘러 흐트러진 초록시트를 정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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