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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해자 시인 / 문자(文字)를 애도함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15.

김해자 시인 / 문자(文字)를 애도함

 

 

  질주하는 말발굽이 아이를 밀어트렸다

  미친 말들이 원 밖으로 밀려난 아이를 쓰러트렸다

 

  전송된 문자 속엔 핏자국이 낭자했다

  먹물을 머금은 말이 뚝뚝 문신을 새기는 중이었다

 

  어떤 말은 죽음보다도 아파서 질근질근

  씹어대는 문자를 피한다는 게 그만 벼랑이었다

 

  금 밖에서 아이를 보듬어 안을 더 큰 원을 그렸으나

  문자 밖으로 훌쩍 뛰어넘어간 아이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곳은 말이 없는 곳, 하늘로 가는 길은 사방이 문이었다

  그곳은 문이 없는 곳, 빗장도 열쇄도 없어서 다시 데려올 수 없는 곳

 

    해변에서 모래장난 하던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바다 속에서 출렁출렁 춤추던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바다로 가지 못한 거대한 고래가 검은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산 것을 삼켜 죽은 말들을 토해내는 거대한 연통에서 연기가 솟구치고 있다

 

  아, 우리가 키운 고래가 너를 집어삼켰구나

  네 뱃속에서 태어날 미래의 아이까지 지워버렸구나

 

  아이야 나오거라 구불구불한 검붉은 내장을 헤치고

  아이야 나오너라 푸른 즙 넘실거리는 태초의 바다로

 

  한 우주가 사라질 때 오, 천사여

  당신 날개는 어디 있었는가

 

웹진 『시인광장』 2012년 9월호 발표

 

 


 

김해자 시인

1961년 목포에서 출생. 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를 통해 등단. 제8회 '전태일문학상'과 2008년 '백석문학상' 수상. 현재 진보생활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