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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가을 시인 / 형상학적 시 레시피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15.

이가을 시인 / 형상학적 시 레시피

 

 

  1.

 

  글자는 가장 오래된 인간의 포획물, 처음엔 암호같은 기호였다

  그녀의 요리는 매번 다른 글자의 맛, 고감도 혀로

  맛을 읽어라 그녀는 글자요리 전문가

  잘 비빔된 글자들 암호같은 글자를 해독하기 위해

  맛보고 만지고 읽다가 중독되었다

  시를 요리하는 여자, 형상화된 감각, 냄새와 타고난 미각의

  그녀의 요리가 은유다

  형이상학 시가 얹힌 요리는 백년 조선시대부터 전해져왔다

  고종이 아침 참식으로 비빔식 글자요리를 즐겼다는

  살짝 불에 익히거나 손의 온도에 간 맞춘

  날마다 제목이 다른 요리들

  가베와 즐겼다던가

  동양적 향에 가장 모던하고 서구적 향이 가미되어

  잡탕식이 아닌 배열의, 배열에 의한 글자의 맛을

  모던한 고감도 혀는 선동했을 것이다

  가베를 마시며 음미된 요리는 즐거운 중독

  요리된 시, 요리에도 시가 있다는 말

  글자에 중독되지 않고 글자를 읽는 법이 없을까

 

  2.

 

  냉장고를 연다

  냉장고는 엄마의 거대한 글자저장고

  빙하기부터 열대기를 거쳐 발췌된 글자들이

  신석기부터 현대까지 주석을 달고 누런 이빨처럼 빼곡하다

  사물함의 칸칸마다 3만5천 년을 지나

  인간의 고유의 언어들

  더러 미이라 형태의 잘 보존된 글자들

  흰 뼈로 추출돼 삐뚤빼뚤 난해하다

  무덤 속 유물로의 부패를 막기위해

  붉은 과즙 유액을 발랐지만 잘 건조되지 못한 글자는 맛에 실패다

  푸른, 혹은 흰 곰팡이를 핀 글자들

  잘 발효되지 못한 맛을 품고 있다

 

웹진 『시인광장』 2012년 9월호 발표

 

 


 

이가을 시인

경기 남양주시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창과 졸업.1998년《현대시학》에 <못 박는 집> 외 9편으로 등단. 시집으로 『봄, 똥을 누다』(한국문연, 2000)와 『저기, 꽃이 걸어간다』(동학사, 2004)가 있음. 1999년 문예진흥원 작가기금 수혜. 2004년 문예진흥원 작가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