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최정란 시인 / 지하철 손잡이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18.

최정란 시인 / 지하철 손잡이들

 

 

삽은 어디로 가고, 자루만 남았다

늦은 밤 지하철 천장에 매달린 삽자루들

보이지 않는 삽날, 하늘 향해 세우고,

갑작스런 생의 급제동에도 고꾸라지지 않기 위해

끝없이 파야하는 삶의 구덩이들, 밤늦어

빈 좌석이 듬성듬성 생기고 난 뒤에야 비로소

뒷덜미 움켜잡는 운명의 무게를 내려놓는다

새벽같이 일찍 일어나, 선 채로

어디 먼 곳까지 가서, 종일토록

단단하게 얼어붙은 땅을 파고 온 것일까

단단히 움켜쥔 삽자루 끝까지 전해오던

삽날에 부딪히던 돌멩이의 기억이 얼얼한지

지그시 눈 감은 이마가 찡그려진다

비몽에서 사몽으로 흔들리는 삽자루들

단조로운 두 박자의 춤곡에 맞춰 밟는 허공의

스텝 넘어, 끊어질 듯 이어지는 꿈속으로

보이지 않는 삽들이 어둠에 파놓은 별들,

반짝, 나타났다 사라지기라도 하는 듯,

내릴 역을 놓치지 않아야, 내일 다시

저 삽자루를 잡고 삽질할 것이라는 듯,

아침부터 삽자루를 잡았던 차가운 손이

굳은살 박인 손바닥을 마주 비비며

얕은 잠의 끈을 바투 잡는다, 열차가 어느

가파른 모퉁이를 둥글게 휘며 돌고 있는지

규칙적인 추운동이 일제히 커진다

 

 


 

 

최정란 시인 / 짧은 시간을 여우빵집

 

 

오후 다섯 시의 여우빵집은 골목이 활동무대다

아파트와 노을 사이, 지하철역과 퇴근 사이

 

하얀 요리사 모자를 쓰고

시식용 크림빵을 골목에 내놓는 빵집 주인은

프렌치 자수가 놓인 하얀 포플린 앞치마 밑에

통통한 꼬리를 숨기고 있다

 

골목을 사로잡은 빵맛의 비법이 꼬리에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이미 사람이 된 지 오래인 그는

더 이상 사람들 앞에 꼬리를 내보이지 않는다

대신 주기적으로

소독차 꽁무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처럼

갓 구운 빵 냄새를 자욱하게 풍긴다

 

아무리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여우는 여우인데

왜 꼬리 흔들고 싶을 때가 없을라고,

 

입과 입을 건너가며 소문들 수군거리는 동안

저도 모르게 출출해져서

단팥빵과 곰보빵 봉지를 집어드는 사람들

등 뒤에 꼬리 하나씩 달고 나온다

 

누구의 뒷모습에서 방금 빠져 나왔는지

보이지 않는 꼬리가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고 있다

 

빵 냄새는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지고 있다

 

 


 

 

최정란 시인 / 친절한 인생

 

 

처음 바닥에 패대기쳐졌을 때 알았어야 했어

삶은 내게 친절하지 않을 거라는 것

 

누가 백일홍의 발목을 거는지 걸핏하면 엎어지지

개구리처럼 바닥에 엎드려 알게 되지

 

허방은 지하주차장 경사로에 숨어 있고

허방은 꽃 속에서 나풀거리며 날아오르고

 

이번 생은 발에 안 맞는 빨간 뾰족구두

이번 생은 킬힐에 안 맞는 평발

 

그렇다고 내가 삶에게 불친절할 필요는 없잖아

백일홍에게는 백일홍의 하늘이 있으니까

 

 


 

최정란 시인

1961년 경북 상주 출생.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계명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수료. 200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두실역 일 번 출입구〉 당선  등단. 시집으로 『여우장갑』 (문학의전당, 2007), 『입술거울』( 문학수첩, 2012), 『사슴목발애인』(산지니, 2016) 이 있음.  2008년 부산작가회의창작기금. 2009년 제1회 요산창작기금. 2016년 부산문화재단창작기금 수혜, 2016년 제7회 시산맥작품상 수상, 2017년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