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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길상호 시인 / 그 노인이 지은 집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18.

길상호 시인 / 그 노인이 지은 집

 

 

그는 황량했던 마음을 다져 그 속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먼저 집 크기에 맞춰 단단한 바탕의 주춧돌 심고

세월에 알맞은 나이테의 소나무 기둥을 세웠다

기둥과 기둥 사이엔 휘파람으로 울던 가지들 엮어 채우고

붉게 잘 익은 황토와 잘게 썬 볏짚을 섞어 벽을 발랐다

벽이 마르면서 갈라진 틈새마다 스스스, 풀벌레 소리

곱게 대패질한 참나무로 마루를 깔고도 그 소리 그치지 않아

잠시 앉아서 쉴 때 바람은 나무의 결을 따라 불어가고

이마에 땀을 닦으며 그는 이제 지붕으로 올라갔다

비 올 때마다 빗소리 듣고자 양철 지붕을 떠올렸다가

늙으면 찾아갈 길 꿈길뿐인데 밤마다 그 길 젖을 것 같아

새가 뜨지 않도록 촘촘히 기왓장을 올렸다

그렇게 지붕이 완성되자 그 집, 집다운 모습이 드러나고

그는 이제 사람과 바람의 출입구마다 준비해둔 문을 달았다

가로 세로의 문살이 슬픔과 기쁨의 지점에서 만나 틀을 이루고

하얀 창호지가 팽팽하게 서로를 당기고 있는,

불 켜질 때마다 다시 피어나라고 봉숭아 마른 꽃잎도 넣어둔,

문까지 달고 그는 집 한 바퀴를 둘러보았다

못 없이 흙과 나무, 세월이 맞물려진 집이었기에

망치를 들고 구석구석 아귀를 맞춰나갔다

토닥토닥 망치 소리가 맥박처럼 온 집에 박혀들었다

소리가 닿는 곳마다 숨소리로 그 집 다시 살아나

하얗게 바랜 노인 그 안으로 편안히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길상호 시인 / 길은 어디로 가나

 

 

조심조심 저 길 끌어당기면

방패연처럼 뚫린 마음의 구멍

달빛으로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며 걷는데

순간, 툭, 길이 끊기고 만다

사라진 달은 어느 가지에 걸려

창백한 얼굴로 울고 있을까

팽팽했던 길은 또 어디서

긴장이었던 삶을 풀어놓고 있을까

발목의 매듭 자리 꽃물 젖으며

마음의 구멍 더 넓어져 갔다.

 

 


 

 

길상호 시인 / 돌탑을 받치는 것

 

 

반야사 앞 냇가에 돌탑을 세운다

세상 반듯하기만 한 돌은 없어서

쌓이면서 탑은 자꾸만 중심을 잃는다

모난 부분은 움푹한 부분에 맞추고

큰 것과 작은 것 순서를 맞추면서

쓰러지지 않게 틀을 잡아보아도

돌과 돌 사이 어쩔 수 없는 틈이

순간순간 탑신의 불안을 흔든다

이제 인연 하나 더 쌓는 일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 벌어진 틈마다

잔 돌 괴는 일이 중요함을 안다

중심은 사소한 마음들이 받칠 때

흔들리지 않는 탑으로 서는 것,

버리고만 내 몸도 살짝

저 빈틈에 기워 넣고 보면

단단한 버팀목이 될 수 있을까

층층이 쌓인 돌탑에 멀리

풍경소리가 날아와서 앉는다

 

 


 

 

길상호 시인 / 무당벌레

 

 

손바닥에 올려놓은 무당벌레

차근차근 손금을 읽다가

사람의 운명이란 게 따분했는지

날아 가버리고 만다

등껍질의 점처럼 선명한

점괘 하나 기다리던 내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어 가는 바람처럼 무심히

무당이란 이름도 버린

벌레,

나는 언제쯤 나에게서 훨훨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길상호 시인 / 바람의 무늬

 

 

산길 숨차게 내려와

제 발자국마다 단풍잎 붉게 물들이는,

잎들뿐 아니라 오래도록 위태롭던

내 마음의 끝가지도 툭툭 부러뜨리는

바람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향천사香川寺 깊은 좌선坐禪 속에서

풍경은 맑은 소리로 바람을 따르고

나의 생각들도 쫓아갔다가 이내

지쳐 돌아오고 마네

 

이 골짜기 전설傳說만큼이나 아득하여서

마음을 접고 서 있네 그랬더니

아주 떠난 줄 알았던 바람 다시 돌아와

이제는 은행나무를 붙잡고 흔들며

노란 쪽지들을 나에게 보내네

 

그 쪽지들을 펴 읽으며 나는

바람과 나무가 나누는

사랑을 알게 되었네, 가을마다

잎을 버리고 바람을 맞이하는 나무의

흔적,

나무는 깊은 살 속에

바람의 무늬 새겨 넣고 있었네

그 무늬로 제 몸 동여매고서

추운 겨울 단단히 버틴 것이네

 

풍경 소리가 내 마음의 골짜기에서

다시 한 번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네

 

 


 

길상호 시인

1973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그 노인이 지은 집〉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문학세계사, 2004)와 『모르는 척』(천년의시작, 2007), 『눈의 심장을 받았네』(실천문학사, 2010)가 있음. 2004년 현대시동인상, 천상병 시상, 김달진 젊은시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