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상호 시인 / 그 노인이 지은 집
그는 황량했던 마음을 다져 그 속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먼저 집 크기에 맞춰 단단한 바탕의 주춧돌 심고 세월에 알맞은 나이테의 소나무 기둥을 세웠다 기둥과 기둥 사이엔 휘파람으로 울던 가지들 엮어 채우고 붉게 잘 익은 황토와 잘게 썬 볏짚을 섞어 벽을 발랐다 벽이 마르면서 갈라진 틈새마다 스스스, 풀벌레 소리 곱게 대패질한 참나무로 마루를 깔고도 그 소리 그치지 않아 잠시 앉아서 쉴 때 바람은 나무의 결을 따라 불어가고 이마에 땀을 닦으며 그는 이제 지붕으로 올라갔다 비 올 때마다 빗소리 듣고자 양철 지붕을 떠올렸다가 늙으면 찾아갈 길 꿈길뿐인데 밤마다 그 길 젖을 것 같아 새가 뜨지 않도록 촘촘히 기왓장을 올렸다 그렇게 지붕이 완성되자 그 집, 집다운 모습이 드러나고 그는 이제 사람과 바람의 출입구마다 준비해둔 문을 달았다 가로 세로의 문살이 슬픔과 기쁨의 지점에서 만나 틀을 이루고 하얀 창호지가 팽팽하게 서로를 당기고 있는, 불 켜질 때마다 다시 피어나라고 봉숭아 마른 꽃잎도 넣어둔, 문까지 달고 그는 집 한 바퀴를 둘러보았다 못 없이 흙과 나무, 세월이 맞물려진 집이었기에 망치를 들고 구석구석 아귀를 맞춰나갔다 토닥토닥 망치 소리가 맥박처럼 온 집에 박혀들었다 소리가 닿는 곳마다 숨소리로 그 집 다시 살아나 하얗게 바랜 노인 그 안으로 편안히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길상호 시인 / 길은 어디로 가나
조심조심 저 길 끌어당기면 방패연처럼 뚫린 마음의 구멍 달빛으로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며 걷는데 순간, 툭, 길이 끊기고 만다 사라진 달은 어느 가지에 걸려 창백한 얼굴로 울고 있을까 팽팽했던 길은 또 어디서 긴장이었던 삶을 풀어놓고 있을까 발목의 매듭 자리 꽃물 젖으며 마음의 구멍 더 넓어져 갔다.
길상호 시인 / 돌탑을 받치는 것
반야사 앞 냇가에 돌탑을 세운다 세상 반듯하기만 한 돌은 없어서 쌓이면서 탑은 자꾸만 중심을 잃는다 모난 부분은 움푹한 부분에 맞추고 큰 것과 작은 것 순서를 맞추면서 쓰러지지 않게 틀을 잡아보아도 돌과 돌 사이 어쩔 수 없는 틈이 순간순간 탑신의 불안을 흔든다 이제 인연 하나 더 쌓는 일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 벌어진 틈마다 잔 돌 괴는 일이 중요함을 안다 중심은 사소한 마음들이 받칠 때 흔들리지 않는 탑으로 서는 것, 버리고만 내 몸도 살짝 저 빈틈에 기워 넣고 보면 단단한 버팀목이 될 수 있을까 층층이 쌓인 돌탑에 멀리 풍경소리가 날아와서 앉는다
길상호 시인 / 무당벌레
손바닥에 올려놓은 무당벌레 차근차근 손금을 읽다가 사람의 운명이란 게 따분했는지 날아 가버리고 만다 등껍질의 점처럼 선명한 점괘 하나 기다리던 내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어 가는 바람처럼 무심히 무당이란 이름도 버린 벌레, 나는 언제쯤 나에게서 훨훨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길상호 시인 / 바람의 무늬
산길 숨차게 내려와 제 발자국마다 단풍잎 붉게 물들이는, 잎들뿐 아니라 오래도록 위태롭던 내 마음의 끝가지도 툭툭 부러뜨리는 바람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향천사香川寺 깊은 좌선坐禪 속에서 풍경은 맑은 소리로 바람을 따르고 나의 생각들도 쫓아갔다가 이내 지쳐 돌아오고 마네
이 골짜기 전설傳說만큼이나 아득하여서 마음을 접고 서 있네 그랬더니 아주 떠난 줄 알았던 바람 다시 돌아와 이제는 은행나무를 붙잡고 흔들며 노란 쪽지들을 나에게 보내네
그 쪽지들을 펴 읽으며 나는 바람과 나무가 나누는 사랑을 알게 되었네, 가을마다 잎을 버리고 바람을 맞이하는 나무의 흔적, 나무는 깊은 살 속에 바람의 무늬 새겨 넣고 있었네 그 무늬로 제 몸 동여매고서 추운 겨울 단단히 버틴 것이네
풍경 소리가 내 마음의 골짜기에서 다시 한 번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정원도 시인 / 귀뚜라미 재회 (0) | 2020.08.18 |
|---|---|
| 김남조 시인 / 물망초 외 4편 (0) | 2020.08.18 |
| 정일근 시인 / 쓸쓸한 섬 외 4편 (0) | 2020.08.18 |
| 최정란 시인 / 지하철 손잡이들 외 2편 (0) | 2020.08.18 |
| 당분 과다 섭취 시 나타나는 증상 4 (0) | 2020.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