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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시인 / 쓸쓸한 섬
우리는 서로를 보지 못했는지 모른다
서로 바라보고 있다 믿었던 옛날에도 나는 그대의 뒤편의 뭍을 그대는 내 뒤편의 먼바다를 아득히 바라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섬이다 그대는 아직 내릴 곳을 찾지 못해 떠도는 저녁 바다 갈매기다
우리는 아직 서로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내 밤은 오고 모두 아프게 사무칠 것이다
정일근 시인 / 어머니의 그륵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 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찿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그륵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 있도록 불러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정일근 시인 / 저쪽
쇠줄에 묶인 큰 개의 눈알이 진녹색이었다 신기하게 여겨 눈을 맞추는 나에게 주인은 무심히 녹내장이라 말했다 개는 이미 앞을 보지 못한다고 말했다
실명한 개가 보이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는 저쪽, 코를 내밀어 자꾸 킁킁거리며 바라보는 저쪽, 은현리 하얀 민들레 한 송이 둥근 씨앗 맺었다가 막 바람에 날리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정일근 시인 / 폭설 그 후
겨울 문의(文義)마을에 가서 폭설을 만났습니다 순식간에 길은 끊어지고, 눈 속에 갇혀 나는 겨울나무처럼 서 있었습니다 아득함의 경계는 어디인지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백색의 화엄 속에서 그대에게로 가는 길을 잃고 말없이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대에게로 가는 길이 모두 지워진 뒤 그대가 나에게 얼마나 그리운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대와 나 사이에 놓인 그 거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정일근 시인 / 한 손
장에 갔다 돌아오시는 아버지 자반고등어 한 손들고 오시네 아버지의 가난한 한 손에 매달린 자반고등어 한 손을 보며 사립문 앞 함박꽃 같은 어머니 함박웃음으로 반기시네 아버지 한 손에 달랑달랑 들고 온 자반고등어 한 손이지만 아버지의 그 손부끄럽지 않게 아버지의 그 손 자랑스럽게 한 손 푸짐하게 들고 오신 듯 너희 아버지 자반고등어 한손 사오셨네! 귀한 자반고등어 한 손이나 사오셨네! 어머니 저녁 내내 즐거워하시네 아버지의 자반고등어 한 손으로 흥부네 아이들은 부자가 되고 흥부네 둥근 두레반상으로 푸짐한 자반고등어 반찬 오를 것이니 고마운 그 사람 누구였을까 흥부 같은 아버지 기죽지 말라고 한 손 그득한 무게를 만든 사람은 한 손이란 아름다운 도량을 만든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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