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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시인 / 물망초
기억해 주어요 부디 날 기억해 주어요 나야 이대로 못잊는 연보라의 물망초지만 혹시는 날 잊으려 바라시면은 유순히 편안스레 잊어라도 주어요
나야 언제나 못잊는 꽃 이름의 물망초지만 깜깜한 밤에 속 잎파리 피어나는 나무들의 기쁨 당신 그늘에 등불 없이 서 있어도 달밤 같은 위로
사람과 꽃이 영혼의 길을 트고 살았을 적엔 미소와 도취만이 큰배 같던 걸 당신이 간 후 바람결에 내버린 꽃 빛 연보라는 못잊어 넋을 우는 물망초지만
기억해 주어요 지금은 눈도 먼 물망초지만.
김남조 시인 / 보통 사람
성당 문 들어설 때 마음의 매무새 가다듬는 사람, 동트는 하늘 보며 잠잠히 인사하는 사람, 축구장 매표소 앞에서 온화하게 여러 시간 줄서는 사람, 단순한 호의에 감격하고 스쳐가는 희망에 가슴 설레며 행운은 의례히 자기 몫이 아닌 줄 여기는 사람, 울적한 신문기사엔 이게 아닌데, 아닌데 하며 안경의 어룽을 닦는 사람, 한밤에 잠 깨면 심해 같은 어둠을 지켜보며 불우한 이웃들을 골똘히 근심하는 사람
김남조 시인 / 빗물 같은 정을 주리라
너로 말하건 또한 나로 말하더라도 빈 손 빈 가슴으로 왔다 가는 사람이지
기린 모양의 긴 모가지에 멋있게 빛을 걸고 서 있는 친구 가로등의 불빛으로 눈이 어리었을까
엇갈리어 지나가다 얼굴 반쯤 그만 봐버린 사람아 요샌 참 너무 많이 네 생각이 난다
사락사락 사락눈이 한줌 뿌리면 솜털 같은 실비가 비단결 물보라로 적시는 첫봄인데 너도 빗물 같은 정을 양손으로 받아주렴
비는 뿌린 후에 거두지 않음이니 나도 스스로운 사랑으로 주고 달라진 않으리라 아무것도 무상으로 주는 정의 자욱마다엔 무슨 꽃이 피는가 이름 없는 벗이여
김남조 시인 / 사랑
오래 잊히음과도 같은 병이었습니다 저녁 갈매기 바닷물 휘어적신 날개처럼 피로한 날들이 비늘처럼 돋아나는 북녘 창가에 내 알지 못할 이름의 아픔이던 것을 하루 아침 하늘 떠받고 날아가는 한 쌍의 떼 기러기를 보았을 때 어쩌면 그렇게도 한없는 눈물이 흐르고 화살을 맞은 듯 갑자기 나는 나의 병 이름의 그 무엇인가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김남조 시인 / 사랑의 말
1 사랑은 말하지 않는 말 아침에 단잠을 깨우듯 눈부셔 못견딘 사랑 하나 입술 없는 영혼 안에 집을 지어 대문 중문 다 지나는 맨 뒷방 병풍 너메 숨어 사네
옛 동양의 조각달과 금빛 수실 두르는 별들처럼 생각만이 깊고 말하지 않는 말 사랑 하나
2 사랑을 말한 탓에 천지간 불붙어 버리고 그 벌이시키는 대로 세상 양끝이 나뉘었었네 한평생 다 저물어 하직 삼아 만났더니 아아 천만번 쏟아 붓고도 진홍인 노을
사랑은 말해버린 잘못조차 아름답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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