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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호 시인 / 자기장을 읽다
밝혀도 꿈틀, 움직일 수 없다 마른 흙바닥 위에 지렁이는 죽고 말았다 자성 강한 죽음이 반대 극의 식욕을 불러들인다 쇳가루처럼 시커멓게 달라붙은 개미 떼 자기장이 참 길기도 하다 식은 국밥 대신 제 몸 한 조각씩 대접하는 한낮의 뜨거운 장례 꼬마들도 뭔가에 이끌린 듯 눈을 떼지 못한다 자기장을 유유히 벗어나는 건 배가 없는 바람뿐이다
길상호 시인 / 저물녘
노을 사이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역
누군가는 떠나야 하고 또 누군가는 남아 견뎌야 하는 시간 우리 앞에 아주 짧은 햇빛이 놓여 있었네
바닥에 흩어진 빛들을 긁어모아 당신의 빈 주머니에 넣어주면서
이미 어둠이 스며든 말은 꺼내지 않았네 그저 눈을 감고 바라보면서 서로의 얼굴을 그려보고 있을 때
어디선가 바람이 한 줄 역 안으로 도착했네
당신은 서둘러 올라타느라 아프게 쓰던 이름을 떨어뜨리고
주워 전해줄 틈도 없이 역은 지워졌다네
흙 묻은 이름을 털어 비석 속에 넣어두고 돌아서야 했던 저물녘
당신의 무덤은 나의 다음 역
길상호 시인 / 차 한 잔
수종사 차방에 앉아서 소리 없이 남한강 북한강의 결합을 바라보는 일, 차통(茶桶)에서 마른 찻잎 덜어낼 때 귓밥처럼 쌓여 있던 잡음도 지워가는 일, 너무 뜨겁지도 않게 너무 차갑지도 않게 숙우(熟盂)에 마음 식혀내는 일, 빗소리와 그 사이 떠돌던 풍경소리도 타관(茶罐) 안에서 은은하게 우려내는 일, 차를 따르며 졸졸 물소리 마음의 먼지도 씻어내는 일, 깨끗하게 씻길 때까지 몇 번이고 찻물 어두운 내장 속에 흘려보내는 일, 퇴수기(退水器)에 찻잔을 헹구듯 입술의 헛된 말도 남은 찻물에 소독하고 다시 한번 먼 강 바라보는 일, 나는 오늘 수종사에 앉아 침묵을 배운다
길상호 시인 / 침엽수림
눈 위로 눈이 또 내립니다
한 번도 데워진 적 없는 바람을 들이마시고 당신의 입술은 얼어붙습니다
새들이 나이테 속 서늘한 돌림노래를 꺼내 숲 속에 풀어놓는 동안
당신은 뾰족한 잎들을 하나씩 뽑아 손톱 밑에 낀 얼음을 긁어냅니다
통점을 잃은 상처들이 덧나서 끝도 없이 퍼렇게 번져갑니다
식은 손가락이라도 잡아보고 싶지만 따뜻한 피가 흐르는 나는
당신의 수목 한계선을 넘을 수 없습니다
길상호 시인 / 희망에 부딪혀 죽다
월요일 식당바닥을 청소하며 불빛이 희망이라고 했던 사람의 말 믿지 않기로 했다 어젯밤 형광등에 몰려들던 날벌레들이 오늘 탁자에, 바닥에 누워 있지않은가 제 날개가 부러지는 줄도 모르고 불빛으로 뛰어들던 왜소한 몸들, 신문에는 복권의 벼락을 기다리던 사내의 자살기사가 실렸다 어쩌면 저 벌레들도 짜릿한 감전을 꿈꾸며 짧은 삶 걸었을지도 모를 일, 그러나 얇은 날개를 가진 사람들에게 희망은 얼마나 큰 수렁이었던가 쓰레받기에 그들의 잔재 담고 있자니 아직 꿈틀대는 숨소리가 들린다 저 단말마의 의식이 나를 이끌어 마음에 다시 불 지르면 어쩌나 타고 없는 날개 흔적을 지우려고 나는 빗자루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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