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길상호 시인 / 자기장을 읽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20.

길상호 시인 / 자기장을 읽다

 

 

밝혀도 꿈틀, 움직일 수 없다

마른 흙바닥 위에

지렁이는 죽고 말았다

자성 강한 죽음이

반대 극의 식욕을 불러들인다

쇳가루처럼 시커멓게

달라붙은 개미 떼

자기장이 참 길기도 하다

식은 국밥 대신

제 몸 한 조각씩 대접하는

한낮의 뜨거운 장례

꼬마들도 뭔가에 이끌린 듯

눈을 떼지 못한다

자기장을 유유히 벗어나는 건

배가 없는 바람뿐이다

 

 


 

 

길상호 시인 / 저물녘

 

 

노을 사이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역

 

누군가는 떠나야 하고

또 누군가는 남아 견뎌야 하는 시간

우리 앞에 아주 짧은 햇빛이 놓여 있었네

 

바닥에 흩어진 빛들을 긁어모아

당신의 빈 주머니에 넣어주면서

 

이미 어둠이 스며든 말은 꺼내지 않았네

그저 눈을 감고 바라보면서

서로의 얼굴을 그려보고 있을 때

 

어디선가 바람이 한 줄 역 안으로 도착했네

 

당신은 서둘러 올라타느라

아프게 쓰던 이름을 떨어뜨리고

 

주워 전해줄 틈도 없이 역은 지워졌다네

 

흙 묻은 이름을 털어 비석 속에 넣어두고

돌아서야 했던 저물녘

 

당신의 무덤은 나의 다음 역

 

 


 

 

길상호 시인 / 차 한 잔

 

 

수종사 차방에 앉아서

소리 없이 남한강 북한강의 결합을 바라보는 일,

차통(茶桶)에서 마른 찻잎 덜어낼 때

귓밥처럼 쌓여 있던 잡음도 지워가는 일,

너무 뜨겁지도 않게 너무 차갑지도 않게

숙우(熟盂)에 마음 식혀내는 일,

빗소리와 그 사이 떠돌던 풍경소리도

타관(茶罐) 안에서 은은하게 우려내는 일,

차를 따르며 졸졸 물소리

마음의 먼지도 씻어내는 일,

깨끗하게 씻길 때까지 몇 번이고

찻물 어두운 내장 속에 흘려보내는 일,

퇴수기(退水器)에 찻잔을 헹구듯

입술의 헛된 말도 남은 찻물에 소독하고

다시 한번 먼 강 바라보는 일,

나는 오늘 수종사에 앉아

침묵을 배운다

 

 


 

 

길상호 시인 / 침엽수림

 

 

눈 위로 눈이 또 내립니다

 

한 번도 데워진 적 없는 바람을 들이마시고

당신의 입술은 얼어붙습니다

 

새들이 나이테 속 서늘한 돌림노래를 꺼내

숲 속에 풀어놓는 동안

 

당신은 뾰족한 잎들을 하나씩 뽑아

손톱 밑에 낀 얼음을 긁어냅니다

 

통점을 잃은 상처들이 덧나서

끝도 없이 퍼렇게 번져갑니다

 

식은 손가락이라도 잡아보고 싶지만

따뜻한 피가 흐르는 나는

 

당신의 수목 한계선을 넘을 수 없습니다

 

 


 

 

길상호 시인 / 희망에 부딪혀 죽다

 

 

월요일 식당바닥을 청소하며

불빛이 희망이라고 했던 사람의 말

믿지 않기로 했다 어젯밤

형광등에 몰려들던 날벌레들이

오늘 탁자에, 바닥에 누워 있지않은가

제 날개가 부러지는 줄도 모르고

불빛으로 뛰어들던 왜소한 몸들,

신문에는 복권의 벼락을 기다리던

사내의 자살기사가 실렸다 어쩌면

저 벌레들도 짜릿한 감전을 꿈꾸며

짧은 삶 걸었을지도 모를 일,

그러나 얇은 날개를 가진 사람들에게

희망은 얼마나 큰 수렁이었던가

쓰레받기에 그들의 잔재 담고 있자니

아직 꿈틀대는 숨소리가 들린다

저 단말마의 의식이 나를 이끌어

마음에 다시 불 지르면 어쩌나

타고 없는 날개 흔적을 지우려고 나는

빗자루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길상호 시인

1973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그 노인이 지은 집〉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문학세계사, 2004)와 『모르는 척』(천년의시작, 2007), 『눈의 심장을 받았네』(실천문학사, 2010)가 있음. 2004년 현대시동인상, 천상병 시상, 김달진 젊은시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