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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의섭 시인 / 꽃의 탄생
불면이란 밤새 벽을 쌓는 일이다 감금, 꺼지지 않는 가로등처럼 뜬눈으로 견디는 밤과 새벽 사이의 생매장 길 잃은 바람이 어제의 그 바람이 같은 자리를 배회하고 고양이 울음은 있는 힘을 다해 어둠을 찢는다 이 터널은 출구가 없다
어떤 기다림은 질병이다 간절한 소식은 끝내 오지 않거나 이미 왔다 가버리는 것
그러니 너는 얼마나 아름답단 말인가
머리를 남쪽으로 두고서야 겨우 잠이 든다 어떤 묘혈은 땅 속을 흘러 다닌다는데 머리맡에 꽃향기가 묻어 있다 첫 매화가 피었다고 한다
윤의섭 시인 / 구름의 율법
파헤쳐 보면 슬픔이 근원이다 주어진 자유는 오직 부유(浮遊) 지상으로도 대기권 너머로도 이탈하지 못하는 궤도를 질주하다 끝없는 변신으로 지친 몸에 달콤한 휴식의 기억은 없다 석양의 붉은 해안을 거닐 때면 저주의 혈통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언제 가라앉지 않는 생을 달라고 구걸한 적 있던가 산마루에 핀 꽃향기와 계곡을 가로지르는 산새의 지저귐으로 때로 물들지만 비릿한 물내음 뒤틀린 천둥소리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 다만 묵묵히 나아갈 뿐이다 한 떼의 무리가 텅 빈 초원을 찾아 떠나간 뒤 홀로 남겨진 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혹은 태양에 맞서다 죽어가고 혹은 잊어버린 지상에서의 한 때를 더듬다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사라져간다 현생은 차라리 구천이라 하고 너무 무거워도 너무 가벼워도 살지 못하는 중천이라 여기고 부박한 영혼의 뿌리엔 오늘도 별빛이 잠든다 이번 여행은 오래 전 예언된 것이다 사지(死地)를 찾아간 코끼리처럼 서녘으로 떠난 무리가 어디 깃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성소는 길 끝에 놓여 있다
윤의섭 시인 / 꿈속의 생시
내가 이 해안에 있는 건 파도에 잠을 깬 수 억 모래알 중 어느 한 알갱이가 나를 기억해냈기 때문 이다 갑자기 나타난 듯 발자국은 보이지 않고 점점 선명해지는 수평선의 아련한 일몰 언젠가 여기 와봤던가 그 후로도 내게 생이 있었던가
내가 이 산길을 더듬어 오르는 건 흐드러진 저 유채꽃 어느 수줍은 처녀 같은 꽃술이 내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처녀지를 밟는다 꿈에서 추방된 자들의 행렬이 산 아래로 보이기 시작한다 문득 한적한 벤치에 앉아 졸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바다는 계속해서 태양을 삼킨다 하루에도 밤은 두 번 올 수 있다 그리하여 몇 번이고 나는 생의 지층에 켜켜이 묻혔다 불려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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