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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영미 시인 / 꽃집에서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20.

최영미 시인 / 꽃집에서

 

 

프리지아

백합

국화

안개똧

 

화려한 꽃다발은 저리 치우고

 

섞이지 않는

하나의 향기로 너는 다가와라

 

 


 

 

최영미 시인 / 꿈의 페달을 밟고

 

 

내 마음 저 달처럼 차 오르는데

네가 쌓은 돌담을 넘지 못하고

새벽마다 유산되는 꿈을 찾아서

잡을 수 없는 손으로 너를 더듬고

말할 수 없는 혀로 너를 부른다

몰래 사랑을 키워온 밤이 깊어 가는데

 

꿈의 페달을 밟고 너에게 갈 수 있다면

시시한 별들의 유혹은 뿌리쳐도 좋았다

 

 


 

 

최영미 시인 / 꿈이 빠져나간 주머니

 

 

전성기가 지난 속옷들이

빨랫줄에 걸려 있다

 

꿈이 빠져나간 주머니

나란히 접힌 순면 100퍼센트가 슬퍼

 

일요일 저녁에 구워먹은 소고기가

적막한 위를 통과하고

낡은 나의 자화상을 응시하는 시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금요일과 토요일이 바구니에 담겨

 

세탁기에 들어가

구겨지는 욕망

90도로 삶아도 지워지지 않는 지난 여름의 얼룩들

초대받지 못한 젊음이

이불을 두 겹 덮고도 추운 겨울밤

 

 


 

 

최영미 시인 / 낙엽

 

 

아스팔트 위에 먼지처럼

왔다 가는 인생들

 

낙엽만이 위안이다

 

반 지하 셋방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서러운 현재를 덮고

어머니의 도저히 갚지 못할 해묵은 빚도 파쿧고

나의 얄량한 죄의식도 바람에 날려 보내고

 

오래 참은 눈물처럼 쏟아지는 낙엽

 

유행가를 들으며

내 손에서 부드럽게 구겨지는 너

여름은 사랑의 계절……

여름은 젊음의 계절……

내게도 여름이 있었던가?

 

 


 

 

최영미 시인 / 내 마음의 비무장지대

 

 

커피도 홍차도 아니야

재미없는 소설책을 밤늦도록 붙잡고 있는 건

비 그친 뒤에도 우산을 접지 못하는 건

짐을 쌌다 풀었다 옷만 갈아입는 건

어제의 시를 고쳐쓰게 하는 건

커피도 홍차도 아니야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어

돌아누워도 엎드려도

머리를 헝클어도 묶어보아도

 

새침 떨어볼까요 청승 부려볼까요

처맨 손 어디 둘 곳 몰라

찻잔을 쥘까요 무릎 위에 단정히 놓을까요

은근히 내리깔까요 슬쩍 훔쳐볼까요

들쑥날쑥 끓는 속 어디 맬 곳 몰라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가슴속 뒤져보면

 

그래도 어딘가 남아 있을, 잡초 우거진

내 마음의 비무장지대에 그대, 들어오겠나요

어느날 문득 소나기 밑을 젖어보겠나요

잘 달인 추억 한술

취해서 꾸벅이는 밤

너에게로, 너의 정지된 어깨 너머로

잠수해 들어가고픈

 

비라도 내렸으면

 

 


 

최영미(崔泳美) 시인

1961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대 서양사학과와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1992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속초에서〉 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는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창작과비평사, 1994)와 『꿈의 페달을 밟고』(창작과비평사, 1998), 『돼지들에게』(실천문학사, 2005), 『도착하지 않은 삶』(문학동네, 2009)와 산문집 『시대의 우울: 최영미의 유럽일기』와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번역서 『화가의 잔인한 손: 프란시스 베이컨』이 있고 영역시집 등을 출간. 2006 제13회 이수문학상 시부문경력. 2011.2 국회도서관 홍보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