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영미 시인 / 꽃집에서
프리지아 백합 국화 안개똧
화려한 꽃다발은 저리 치우고
섞이지 않는 하나의 향기로 너는 다가와라
최영미 시인 / 꿈의 페달을 밟고
내 마음 저 달처럼 차 오르는데 네가 쌓은 돌담을 넘지 못하고 새벽마다 유산되는 꿈을 찾아서 잡을 수 없는 손으로 너를 더듬고 말할 수 없는 혀로 너를 부른다 몰래 사랑을 키워온 밤이 깊어 가는데
꿈의 페달을 밟고 너에게 갈 수 있다면 시시한 별들의 유혹은 뿌리쳐도 좋았다
최영미 시인 / 꿈이 빠져나간 주머니
전성기가 지난 속옷들이 빨랫줄에 걸려 있다
꿈이 빠져나간 주머니 나란히 접힌 순면 100퍼센트가 슬퍼
일요일 저녁에 구워먹은 소고기가 적막한 위를 통과하고 낡은 나의 자화상을 응시하는 시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금요일과 토요일이 바구니에 담겨
세탁기에 들어가 구겨지는 욕망 90도로 삶아도 지워지지 않는 지난 여름의 얼룩들 초대받지 못한 젊음이 이불을 두 겹 덮고도 추운 겨울밤
최영미 시인 / 낙엽
아스팔트 위에 먼지처럼 왔다 가는 인생들
낙엽만이 위안이다
반 지하 셋방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서러운 현재를 덮고 어머니의 도저히 갚지 못할 해묵은 빚도 파쿧고 나의 얄량한 죄의식도 바람에 날려 보내고
오래 참은 눈물처럼 쏟아지는 낙엽
유행가를 들으며 내 손에서 부드럽게 구겨지는 너 여름은 사랑의 계절…… 여름은 젊음의 계절…… 내게도 여름이 있었던가?
최영미 시인 / 내 마음의 비무장지대
커피도 홍차도 아니야 재미없는 소설책을 밤늦도록 붙잡고 있는 건 비 그친 뒤에도 우산을 접지 못하는 건 짐을 쌌다 풀었다 옷만 갈아입는 건 어제의 시를 고쳐쓰게 하는 건 커피도 홍차도 아니야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어 돌아누워도 엎드려도 머리를 헝클어도 묶어보아도
새침 떨어볼까요 청승 부려볼까요 처맨 손 어디 둘 곳 몰라 찻잔을 쥘까요 무릎 위에 단정히 놓을까요 은근히 내리깔까요 슬쩍 훔쳐볼까요 들쑥날쑥 끓는 속 어디 맬 곳 몰라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가슴속 뒤져보면
그래도 어딘가 남아 있을, 잡초 우거진 내 마음의 비무장지대에 그대, 들어오겠나요 어느날 문득 소나기 밑을 젖어보겠나요 잘 달인 추억 한술 취해서 꾸벅이는 밤 너에게로, 너의 정지된 어깨 너머로 잠수해 들어가고픈
비라도 내렸으면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박설희 시인 / 완강한 텍스트 (0) | 2020.08.20 |
|---|---|
| 정호승 시인 / 그리운 부석사 외 4편 (0) | 2020.08.20 |
| 윤의섭 시인 / 꽃의 탄생 외 2편 (0) | 2020.08.20 |
| 김남조 시인 / 새 달력 첫 날 외 4편 (0) | 2020.08.20 |
| 길상호 시인 / 자기장을 읽다 외 4편 (0) | 2020.08.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