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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설희 시인 / 완강한 텍스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20.

박설희 시인 / 완강한 텍스트

 

 

  이사를 하려고 짐을 정리하다 보니 마루 밑에 자루, 그 속에 팔들이 가득, 손이 달린 팔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누군가 맡겨놨는데 언제 맡겼는지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무슨 짓을 했던 팔들인지, 이사를 해야 하는데 팔들이 한 자루

 

  죽은 자와 마주쳐 간신히 벗어났다 싶으니 또 다른 주검과 마주치고 산 사람보다는 죽은 자와 더 많이 마주쳐 이제 그만 죽은 자들은 신물이 난다고 체머리를 흔드는데 흰 상여가 거리 저쪽에서 뚜렷이 다가오고

 

  생전 처음 보는 집을 내 집이라고 들어가 차 마시고 이야기 나누고 다시 나와 거닐다 보면 바닷가, 파도 넘실거리다가 기어코 해일이 덮치는 그 마을 수천 번도 넘게 해일이 덮쳤는데

 

  어느 날 문득 낯선 들판에 홀로 서서는 이름도 기억도 잊어버리고 기억이 없다는 것만 기억 나 드디어 다 벗어버렸다고 뿌듯해하다가 다음 순간 버스며 사람들 혼잡한 거리를 다시 헤매는

 

  수없이 재생되는 친숙하게 낯선 거기,

  매번 돌아오고야 기억나는 거기의 나는 누구인가

  심연처럼 들여다보고 있는 눈,을

  빤히 마주보고 있는 나는

 

웹진 『시인광장』 2012년 10월호 발표

 

 


 

박설희 시인

2003년 계간 《실천문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쪽문으로 드나드는 구름』(실천문학, 2008)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