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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호승 시인 / 그리운 부석사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20.

정호승 시인 / 그리운 부석사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정호승 시인 / 기차

 

 

  떠나간 기차를 용서하라

  기차도 때로는 침묵이 필요하다

  굳이 수색쯤 어디 아니더라도

  그 어느 영원한 선로 밖에서

  서로 포기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다.

 

 


 

 

정호승 시인 / 까닭

 

 

내가 아직 한 포기 풀잎으로 태어나서

풀잎으로 사는 것은

아침마다 이슬을 맞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짓가랑이를 적시며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견디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 한 송이 눈송이로 태어나서

밤새껏 함박눈으로 내리는 것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싸리빗자루로 눈길을 쓰시는

어머니를 위해서가 아니라

눈물도 없이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고이 남기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도 쓸쓸히 노래 한 소절로 태어나서

밤마다 아리랑을 부르며 별을 바라보는 것은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를 사랑하기엔

내 인생이 너무나 짧기 때문이다.

 

 


 

 

정호승 시인 / 꽃 지는 저녁

 

 

꽃이 진다고 아예 다 지나

꽃이 진다고 전화도 없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지는 꽃의 마음을 아는 이가

꽃이 진다고 저만 외롭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꽃 지는 저녁에는 배도

 

 


 

 

정호승 시인 / 끝끝내

 

 

헤어지는 날까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헤어지는 날까지

차마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그대 처음과 같이 아름다울 줄을

그대 처음과 같이 영원할 줄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순결하게 무덤가에 무더기로 핀

흰 싸리 꽃만 꺾어 바쳤습니다.

 

사랑도 지나치면 사랑이 아닌 것을

눈물도 지나치면 눈물이 아닌 것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정호승 시인

1950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새벽편지》 등이, 시선집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흔들리지 않는 갈대》 등이, 어른이 읽는 동화로 《연인》《항아리》《모닥불》《기차 이야기》 등이, 산문집 《소년부처》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