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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남조 시인 / 아가(雅歌) 2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22.

김남조 시인 / 아가(雅歌) 2

 

 

네게로 가리

한사코 가리라

이슬에 씻은 빈손이어도 가리라

눈 멀어도 가리라

 

세월이 겹칠수록

푸르청청 물빛

이 한(恨)으로 가리라

 

네게로 가리

저승의 지아비를

내 살의 반을 찾으러

검은머리 올올이

혼령이 있어

그 혼의 하나하나 부르며 가리

 

네게로 가리

 

 


 

 

김남조 시인 / 아버지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버지가 지어준 아들의 이름

그 좋은 이름으로

아버지가 불러주면

아들은 얼마나 감미로운지

아버지는 얼마나 눈물겨운지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아 아버지가 불러주는

아들의 이름은

세상의 으뜸같이 귀중하여라

달무리 둘러둘러 아름다워라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들을 부르는

아버지의 음성은

세상 끝에서 끝까지 잘 들리고

하늘에서 땅까지도 잘 들린다

아버지가 불러주는

아들의 이름은

생모시 찢어내며 가슴 아파라

 

 


 

 

김남조 시인 / 안식

 

 

이제 그는 쉰다

처음으로 안식하는 이를 위해

그의 집에

고요와 평안 넉넉하고

겨우 깨달아

그의 아내도

바쁜 세상으로부터 돌아와

손을 씻으니

해돋이에서 해넘이까지

바쁜 일이라곤 없어라

 

그가 보던 것

간절히 바라보고

그가 만지던 것

오래오래 어루만지는 사이

막힘 없이 흐르는 시간

가슴 안의 구명으로

솔솔 빠져나가고

머릿속에 붐비는 피도

옥양목 흰빛으로

솰솰 새어나가누나

 

울지 말아라

울지 말아라

남루한 그녀 영혼도

빨아 헹구어

희디하얗게 표백한다면

절대의 절대적 절망

이 숯덩이도

벼루에 먹 갈리듯

풀어질 날 있으리니

 

슬퍼 말아라

슬픔은 소리내고 싶은 것

조용하여라

달빛 자욱한 듯이

온 집안 가득히

그가 쉬고 있다

 

 


 

 

김남조 시인 / 안식을 위하여

 

 

겨울나무 옆에

나도 나무로 서 있다

겨울나무 추위 옆에

나도 추위로 서 있다

추운 이들

함께 있구나 여길 때

추위의 위안 물결 인다 하리라

 

겨울나무 옆에 서서

적멸한 그 평안

숙연히 본받고 지노니

휴식 모자라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여기는

내 자식들이

쉬라고 쉬라고 엄마를 조르는

그 당부 측은히

헤아린다 하리라

 

안식의 정령이어

산 이와 죽은 이를

한 품에 안아 주십사 비노니

겨울바람의 풍금

느릿느릿 울려 주십사고도 비노니

큰 촛불, 작은 촛불처럼

겨울나무와 내가

나란히 기도한다 하리라

 

 


 

 

김남조 시인 / 어떤 소년

 

 

꽃 배달처럼

나의 병실을 찾아온

소년에게

내 처지 지금 감방 같다 했더니

그 아이 말이

저는 어디 있으나

황무지며 사막이예요. 란다

넌 좀 낙관주위가 돼야겠어

놀라는 내 대꾸에

그건 비관주의보단 더 나쁜 거예요

헤프고 바보그럽고

맥빠져 있으니까요, 란다

 

아이야

천길 벼랑에서

밑바닥 굽어본 일

벌써 있었더냐

온몸의

뇌관이 저려들면서

허공에 두 손드는

시퍼런 투항도 해보았더냐

 

더하기로는

심장 한가운데를 쑤시던

사람 하나가

날개 달아

네 몸 두고 날아갔느냐

.... 아이야

 

 


 

김남조(金南祚, 1927.9.26~ ) 시인

1927년 경북 대구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과 졸업. 1953년 첫 시집 《목숨》으로 등단. 시집으로 『목숨』, 『나아드의 향유』, 『나무와 바람』, 『정념의 기』, 『풍림의 음악』,『겨울 바다』, 『설일』, 『사랑 초서』, 『동행』, 『김대건 신부』, 『빛과 고요』, 『바람 세례』, 『평안을 위하여』, 『희망 학습』 등과 수상집 및 콩트집 『아름다운 사람들』외 다수가 있음. 자유문인협회상(1958), 오월문예상(1963), 시인협회상(1974), 국민훈장 모란장(1993년), 대한민국예술원상(1996), 은관문화훈장(1998), 만해대상(2007) 등을 수상.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한국시인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역임. 현재 숙명여대 명예교수, 예술원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