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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 / 미치도록 그리웠던 사랑
가을에는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최영미 시인 / 백화점 가는 길
내 욕망의 절반은 백화점이 해결해준다
식품관은 지하에 화장품은 1층에 청바지는 2층에 구두는 3층에 침대는……
전 세계가 모인 곳 미국과 유럽과 아시아의 상점에서도 진열되지 않은 내 욕망의 나머지 절반을 채워줄
그, 에게 발견되고파 치명적인 향기를 수집한다 샤넬 디올 아베다……
갖고 싶어서 갖고 싶지 않아서 아무 것도 사지 못한 불안한 오후
샴퓨는 1층에 청바지는 2층에 구두는 3층에 그이는 어디에? 어디쯤 가고 있을까?
최영미 시인 / 불면의 일기
어떤 책도 읽히지 않았다 어떤 별도 쏟아지지 않았다
고독은 이 시처럼 줄을 맞춰 오지 않는다
내가 떠나지 못하는 이 도시 끝에서 끝으로 노래가 끊이지 않고 십 년 보다 긴 하루가 뒤돌아 제 그림자를 지워나갈 때 지상에서 마지막 저녁을 마시려 버스를 탄다 밤은 멎었지만 밤보다 더 어두운 저녁에 차창 가에 닻을 내린 한숨이 묻어둔, 그 의미를 해독하지 못해 아직도 낯선 과거를 불러낸다 서로 빠져나오려 싸우는 기억들이 서로를 삼키는 시간 왜? 지나간 것들은... 지나간 것들은…… 용서하지 못하는가 잃어버린 삶의 지도를 찾아 그리는 눈동자 속에 흔들리며 떠 있는 나무 한 그루, 병든 잎들이 바람에 몸을 떨며 아우성친다 얼마나 더 흔들려야 무너질 수 있나
우리가 변화시킨 세상이, 세상이 변화시킨 우리를 비웃고 총천연색으로 시위하는 네온사인 불빛들이 멀리 하늘의 별을 비웃고 딸꾹질하듯 저녁에 어이없이 넘어가는데 지난날의 들뜬 노래와 비명을 매장한 뒷골목을 순례하며 두리번거린다 조각난 상념들을 꿰맞추며 두리번거린다
아, 차라리, 온전히 미치기라도 했으면…… 읽고 싶지 않은 이 세상을 웃어, 넘기라도 할 텐데
최영미 시인 / 사는 이유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시가 그렇고 술이 그렇고 아가의 뒤뚱한 걸음마가 어제 만난 그의 지친 얼굴이 안부 없는 사랑이 그렇고 지하철을 접수한 여중생들의 깔깔웃음이 생각나면 구길 수 있는 흰 종이가 창 밖의 비가 그렇고 빗소리를 죽이는 강아지의 컹컹거림이 매일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렇다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난 투명해진다 치열하게 비어가며 투명해진다
아직 건재 하다는 증명 아직 진통할 수 있다는 증명 아직 살아 있다는 무엇
투명한 것끼리 투명하게 싸운 날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오르지 않는다
최영미 시인 / 사랑의 시차
내가 밤일 때 그는 낮이었다. 그가 낮일 때 나는 캄캄한 밤이었다.
그것이 우리 죄의 전부였지
나의 아침이 너의 밤을 용서 못하고 너의 밤이 나의 오후를 참지 못하고
피로를 모르는 젊은 태양에 눈멀어 제 몸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맨발로 선창가를 서성이며 백야의 황혼을 잡으려 했다.
내 마음 한켠에 외로이 떠있던 백조는 여름이 지나도 떠나지 않고
기다리지 않아도 꽃이 피고 꽃이 지고 그리고 가을, 그리고 겨울.
곁에 두고고 가고 오지 못했던 너와 나, 면벽한 두 세상……
최영미 시인 / 사랑의 힘
커피를 끓어 넘치게 하고 죽은 자를 무덤에서 일으키고 촛불을 춤추게 하는
사랑이 아니라면 밤도 밤이 아니다 술잔은 향기를 모으지 못하고 종소리는 퍼지지 않는다
그림자는 언제나 그림자 나무는 나무 바람은 영원한 바람 강물은 흐르지 않는다
사랑이 아니라면 겨울은 뿌리째 겨울 꽃은 시들 새도 없이 말라죽고 아이들은 옷을 벗지 못한다
머리칼이 자라나고 초생달을 부풀게 하는 사랑이 아니라면 처녀는 창가에 앉지 않고 태양은 솜이불을 말리지 못한다
석양이 문턱에 서성이고 베갯머리 노래를 못 잊게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면 미인은 늙지 않으리 여름은 감탄도 없이 시들고 아카시아는 독을 뿜는다
한밤중에 기대앉아 바보도 시를 쓰고 멀쩡한 사람도 미치게 하는 정녕 사랑이 아니라면 아무도 기꺼이 속아 주지 않으리
책장의 먼지를 털어 내고 역사를 다시 쓰게 하는 시랑이 아니면 계단은 닳지 않고 아무도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커피를 끊어 넘치게 하고 죽은 자를 무덤에 일으키고 촛불을 춤추게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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