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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호승 시인 / 리기다 소나무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22.

정호승 시인 / 리기다 소나무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한 그루 리기다 소나무 같았지요

푸른 리기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던 바다의 눈부신 물결 같았지요

 

당신을 처음 만나자마자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솔방울이 되길 원했지요

보다 바다 쪽으로 뻗어나간 솔가지가 되어

가장 부드러운 솔잎이 되길 원했지요

 

당신을 처음 만나고 나서 비로소

혼자서는 아름다울 수 없다는 걸 알았지요

사랑한다는 것이 아름다운 것인 줄 알았지요

 

 


 

 

정호승 시인 /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슬픔의 가난한 나그네가 되소서.

하늘의 별로서 슬픔을 노래하며

어디에서나 간절히 슬퍼할 수 있고

어디에서나 슬픔을 위로할 수 있는

슬픔의 가난한 나그네가 되소서

슬픔처럼 가난한 것 없을지라도

가장 먼저 미래의 귀를 세우고

별을 보며 밤새도록 떠돌며 가소서.

떠돌면서 슬픔을 노래하며 가소서.

별 속에서 별을 보는 나그네 되어

꿈속에서 꿈을 보는 나그네 되어

오늘밤 어느 집 담벼락에 홀로 기대보소

 

 


 

 

정호승 시인 / 매춘

 

 

 

  옥양목 옷보따리 보리밭에 내던지고

  보리밭에 숨어서 봄밤을 팔아

  버선발로 뛰어오는 봄비를 팔아

  치마끈 풀고 오는 봄바람을 팔아

  누이는 눈 파이고 귀를 잘리고  

 

  군데군데 보리밭은 쓰러지고

  빨가벗고 빨가벗고 보름달은 도망가고

  소버짐 마른버짐 번지는 이땅

  능골 논마지기 빚값에 팔아

  송아지 핥아주던 어미소 팔아

 

  상투깍고 통곡하던 할배도 팔아

  꽁치 두마리 사들고 오던 애비도 팔아

  누이는 소나무에 명주댕기 걸어놓고

  벗으세요 벗으세요

  군데군데 보리밭은 나뒹굴고 나뒹굴고

 

  종다리 치솟는 아지랭이 팔아

  호롱불에 하늘대는 젖가슴 팔아

  호롱불은 넘어지고 보리밭은 타올라

  활활 타올라 누이는 미쳐

  실꾸리 반짇고리 보리밭에 내던지고

 

 


 

 

정호승 시인 / 미안하다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정호승 시인 / 바닷가에 대하여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잠자는 지구의 고요한 숨소리를 듣고 싶을 때

지구 위를 걸어가는 새들의 작은

발소리를 듣고 싶을 때

새들과 함께 수평선 위로 걸어가고 싶을 때

친구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지 못했을 때

서럽게 우는 어머니를 껴안고 함께 울었을 때

모내기가 끝난 무논의 저수지 둑 위에서

자살한 어머니의 고무신 한 짝을 발견했을 때

바다에 뜬 보름달을 향해

촛불을 켜놓고 하염없이

두 손 모아 절을 하고 싶을 때

바닷가 기슭으로만 기슭으로만 끝없이

달려가고 싶을 때

누구나 자기만의 바닷가가 하나씩 있으면 좋다.

자기만의 바닷가로 달려가 쓰러지는 게 좋다.

 

 


 

정호승 시인

1950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새벽편지》 등이, 시선집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흔들리지 않는 갈대》 등이, 어른이 읽는 동화로 《연인》《항아리》《모닥불》《기차 이야기》 등이, 산문집 《소년부처》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