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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남조 시인 / 연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23.

김남조 시인 / 연

 

 

연 하나

날리세요

순지 한 장으로 당신이 내거는

낮달이 보고파요

 

가멸가멸 올라가는

연실은 어떨까요

말하는 마음보다 더욱 먼 마음일까요

하늘 너머 하늘가는

그 마음일까요

 

겨울하늘에

연 하나 날리세요

옛날 저승의 우리집 문패

당신의 이름 석자가

하늘 안의 서러운

진짜 하늘이네요

 

연하나

날리세요

세월은 그렁저렁 너그러운 유수

울리셔도 더는 울지 않고

창공의 새하얀 연을

나는 볼래요

 

 


 

 

김남조 시인 / 연하장

 

 

설날 첫 햇살에

펴 보세요

 

잊음으로 흐르는

망각의 강물에서

옥돌 하나 정 하나 골똘히 길어내는

이런 마음씨로 봐 주세요

 

연하장,

먹으로써도

彩色(채색)으로 무늬 놓는

편지

 

온갖 화해와

함께 늙는 회포에

손을 쪼이는

편지

 

제일 사랑하는 한 사람에겐

글씨는 없이

목례만 드린다.

 

 


 

 

김남조 시인 / 영원 그 안에선

 

 

이별의 돌을 닦으며

고요하게 있자

높은 가지에서 떨어지려는 잎들이

잠시

최후의 기도를 올리듯이

 

아무것도 허전해하지 말자

가을나무의 쏟아지는 잎들을 뜯어 넣고

바람이 또 무엇인가를

빚는다고 알면

그만인걸

 

눈물 다해

한 둘레 눈물 기둥

불망인들 닦고 닦아

혼령 있는 심연 있는

거울이 되도록만 하자

 

이별의 문턱에 와서

마지막 가장 어여쁘게 내가 있고

영원 그 안에선

그대 날마다

새로이 남아 계심을

정녕 믿으마

 

말로는 나타 못낼

위안의 저 청람빛,

하늘 아래 생겨난 모든 일은

하늘 아래 어디엔가 거두어 주시리라

 

 


 

 

김남조 시인 / 오늘

 

 

1

눈 오늘 강물을 바라본다

어렴풋한 꿈속이듯 오랫동안

내 이렇게 있었다

오늘은 당신에게 줄 말이 없다

다만 당신의 침묵과 한 가지 뜻의 묵언(默言)이

내게 머물도록 빌 뿐이다

 

2

오늘 내 영혼을 당신에게 연다

마지막인 허락은

이래야만 함인 줄 알았기에

 

 


 

 

김남조 시인 / 올해의 성탄

 

 

정직해야지

지치고 어둑한 내 영혼을 데리고

먼 길을 떠날 줄도 알아야 한다

 

내밀한 광기

또 오욕

모든 나쁜 순환을 토혈인 양 뱉고

차라리 청신한 바람으로

한 가슴을 채워야 한다

 

크리스마스는

지등을 들고 성당에도 가지만

자욱한 안개를 헤쳐

서먹해진 제 영혼을 살피는 날이다

 

유서를 쓰는,

유서에 서명을 하는,

다시 그 나머지 한 줄의 시를 마지막인 양 끄적이는

어리석고 뜨거운 나여

 

만약에 만월 같은 연모라도 품는다며는

배덕의 정사쯤 쉽사리 저지를

그리도 외롭고 맹목인 열에

까맣게 내 두뇌를 태워 가고 있다

 

슬픔조차 신선하지가 못해

한결 슬픔을 돋우고

어째도 크리스마스는 마음놓고 크게 우는 날이다

석양의 하늘에 커다랗게 성호를 긋고

구원에서 가장 먼 사람이

주여, 부르며 뿌리째 말라 버린 겨울 갈대밭을

달려가는 날이다

 

 


 

김남조(金南祚, 1927.9.26~ ) 시인

1927년 경북 대구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과 졸업. 1953년 첫 시집 《목숨》으로 등단. 시집으로 『목숨』, 『나아드의 향유』, 『나무와 바람』, 『정념의 기』, 『풍림의 음악』,『겨울 바다』, 『설일』, 『사랑 초서』, 『동행』, 『김대건 신부』, 『빛과 고요』, 『바람 세례』, 『평안을 위하여』, 『희망 학습』 등과 수상집 및 콩트집 『아름다운 사람들』외 다수가 있음. 자유문인협회상(1958), 오월문예상(1963), 시인협회상(1974), 국민훈장 모란장(1993년), 대한민국예술원상(1996), 은관문화훈장(1998), 만해대상(2007) 등을 수상.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한국시인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역임. 현재 숙명여대 명예교수, 예술원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