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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 / 반지의 의미
만남에 대하여 기도하자는 것이다. 만남에 대하여 감사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아름답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순결하자는 것이다. 언제나 첫 마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언제나 첫 마음을 잃지 말자는 것이다. 사랑에도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결혼에도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꽃이 진다고 울지 말자는 것이다. 스스로 꽃이 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가난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영원하자는 것이다.
정호승 시인 / 봄길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정호승 시인 / 봄눈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다른 사람에게 눈물을 보이지 말라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절벽 위를 무릎으로 걸어가지 말라 봄눈이 내리는 날 내 그대의 따뜻한 집이 되리니 그대 가슴의 무덤을 열고 봄눈으로 만든 눈사람이 되리니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과 용서였다고 올해도 봄눈으로 내리는 나의 사람아
정호승 시인 / 사랑
밥그릇을 들고 길을 걷는다. 목이 말라 손가락으로 강물 위에 사랑한다라고 쓰고 물을 마신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리고 몇날 며칠 장대비가 때린다. 도도히 황톳물이 흐른다 제비꽃이 아파 고개를 숙인다. 비가 그친 뒤 강둑 위에서 제비꽃이 고개를 들고 강물을 내려다본다. 젊은 송장 하나가 떠내려 오다가 사랑한다 내 글씨에 걸려 떠내려가지 못한다.
정호승 시인 / 사랑
그대는 내 슬픈 운명의 기쁨 내가 기도할 수 없을 때 기도하는 기도 내 영혼이 가난 할 때 부르는 노래 모든 시인들이 죽은 뒤에 다시 쓰는 시 모든 애인들이 끝끝내 지키는 깨끗한 눈물
오늘도 나는 그대를 사랑하는 날보다 원망하는 날들이 더 많았나니 창밖에 가난한 등불 하나 내어 걸고 기다림 때문에 그대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를 기다리나니
그대는 결국 침묵을 깨뜨리는 침묵 아무리 걸어가도 끝없는 새벽길 새벽 달빛 위에 앉아 있던 겨울산 작은 나뭇가지 위에 잠들던 바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던 사막의 마지막 별빛 언젠가 내 가슴 속 봄날에 피었던 흰 냉이꽃
정호승 시인 / 사랑
나는 너의 시체다 5월의 푸른 강물 위로 떠오른 차디찬 너의 죽음이다 너와 나의 끝없는 사랑을 위하여 그 누군가가 강가로 끌어올린 꽃다운 너의 시체 위에 내리는 햇살이다 너는 나의 시체다
봄날의 강물 위로 말없이 떠오른 너는 나의 분노의 시체다 너와 나의 운명을 사랑하기 위하여 모든 죽음의 눈물을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눈부신 너의 주검 위로 지나가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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