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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영미 시인 / 서른 잔치는 끝났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23.

최영미 시인 / 서른 잔치는 끝났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다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최영미 시인 / 선물

 

 

사랑해

당신을 삼십년 사랑했어

 

너무 늦게 나타났어

나는 네가 누구인지 몰라

 

어느 겨울날, 내 방에 들어온 청춘의 빛

잔치가 끝난 뒤의 서른송이 장미

그의 손에서 내 손으로

그의 심장에서 나의 심장으로 불이 붙어

하나로 포개지려는데

 

물에 잠긴 장미 봉오리가

점점 크게 벌어지게

 

나의 마음도

나의 거기도……

 

 


 

 

최영미 시인 / 선운사에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최영미 시인 / 슬픈 까페의 노래

 

 

언젠가 한번 와본 듯하다

언젠가 한번 마신 듯하다

이 까페 이 자리 이 불빛 아래

가만있자 저 눈웃음치는 마담

살짝 보조개도 낯익구나

 

어느 놈하고 였더라

시대를 핑계로 어둠을 구실로

객쩍은 욕망에 꽃을 달아줬던 건

아프지 않고도 아픈 척

가렵지 않고도 가려운 척

밤 새워 날 세워 핥고 할퀴던

아직 피가 뜨겁던 때인가

 

있는 과거 없는 과거 들쑤시어

있는 놈 없는 년 모다 모아

도마 위에 씹고 또 씹었었지

호호탕탕 훌훌쩝쩝

마시고 두드리고 불러제꼈지

그러다 한두 번 눈빛이 엉켰겠지

어쩌면……

부끄럽다 두렵다 이 까페 이 자리는

내 간음의 목격자

 

 


 

 

최영미 시인 / 아도니스를 위한 연가

 

 

너의 인생에도

한번쯤

휑한 바람이 불었겠지.

바람에 갈대 숲이 누울 때처럼

먹구름에 달무리 질 때처럼

남자가 여자를 지나간 자리처럼

시리고 아픈 흔적을 남겼을까?

너의 몸 골목골목

너의 뼈 굽이굽이

상처가 호수처럼 괴어 있을까?

 

너의 젊은 이마에도

언젠가

노을이 꽃잎처럼 스러지겠지

그러면 그때 그대와 나

골목골목 굽이굽이

상처를 섞고 흔적을 비벼

너의 심장 가장 깊숙한 곳으로

헤엄치고프다, 사랑하고프다.

 

 


 

최영미(崔泳美) 시인

1961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대 서양사학과와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1992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속초에서〉 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는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창작과비평사, 1994)와 『꿈의 페달을 밟고』(창작과비평사, 1998), 『돼지들에게』(실천문학사, 2005), 『도착하지 않은 삶』(문학동네, 2009)와 산문집 『시대의 우울: 최영미의 유럽일기』와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번역서 『화가의 잔인한 손: 프란시스 베이컨』이 있고 영역시집 등을 출간. 2006 제13회 이수문학상 시부문경력. 2011.2 국회도서관 홍보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