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남조 시인 / 저무는 날에
날이 저물어 가듯 나의 사랑도 저물어 간다 사람의 영혼은 첫날부터 혼자이던 것 사랑도 혼자인 것
제몸을 태워야만이 환한 촛불같은 것 꿈꾸며 오래오래 불타려 해도 줄어드는 밀랍 이윽고 불빛이 지워지고 재도 하나 안남기는 촛불같은 것
날이 저물어 가듯 삶과 사랑도 저무느니 주야사철 보고지던 그 마음도 세월따라 늠실늠실 흘러가고 사람의 사랑 끝날엔 혼자인 것 영혼도 혼자인 것 혼자서 크신 분이 품안에 눈감는 것
김남조 시인 / 참회
사랑한 일만 빼고 나머지 모든 일이 내 잘못이라고 진작에 고백했으니 이대로 판결해다오
그 사랑 나를 떠났으니 사랑에게도 분명 잘못하였음이라고 준열히 판결해다오
겨우내 돌 위에서 울음 울 것 세 번째 이와 같이 판결해다오 눈물 먹고 잿빛 이끼 청청히 자라거든 내 피도 젊어져 새봄에 다시 참회하리라
김남조 시인 / 평안스런 그대
평안 있으라 평안 있으라 포레의 레퀴엠을 들으면 햇빛에도 눈물 난다 있는 자식 다 데리고 얼음벌판에 앉아있는 겨울햇빛 오오 연민하올 어머니여
평안 있으라 그 더욱 평안 있으라 죽은 이를 위한 진혼 미사곡에 산 이의 추위도 불쬐어 뎁히노니 진실로 진실로 살고 있는 이와 살다간 이 앞으로 살게 될 이들까지 모두가 영혼의 자매이러라
평안 있으라
김남조 시인 / 평행선
우리는 서로 만나본적도 없지만 헤어져 본적도 없습니다
무슨 인연으로 테어 났기에 어쩔수 없는 거리를 두고 가야만 합니까
가까와지면 가까와 질까 두려워 하고 멀어지면 멀어질까 두려워하고
나는 그를 부르며 그는 나를 부르며
스스로를 져 버리며 가야만 합니까
우리는 아직 하나가 되어 본적도 없지만은
둘이 되어 본적도 없습니다.
김남조 시인 / 하느님의 동화
절망이 이리도 아름다운가 홍해에까지 쫓긴 모세는 황홀한 어질머리로 바다를 본다
하느님이 먼저 와 계셨다 이르시되 너의 지팡이로 바다를 치면 너희가 건널 큰 길이 열릴 것이니라. 하느님께선 동화를 쓰고 계셨다 지팡이 끝이 가위질처럼 바다를 두 피륙으로 갈라 둥글게 말아 올리며 길을 내는 대목, 동화는 이쯤 쓰여지고 있었다
모세의 지팡이 물을 쳤으되 실바람 한 주름이 일 뿐이더니
일행 중의 한 사람이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그 믿음으로 길이 열려 그들이 모두 바다를 건넜다
홍해 기슭 태고의 고요에 홀로 남으신 하느님, 오늘의 동화는 괜찮게 쓰인 편이라고 저으기 즐거워 하신다
김남조 시인 / 허망(虛妄)에 관하여
내 마음을 열 열쇠꾸러미를 너에게 준다 어느 방 어느 서랍이나 금고도 원하거든 열거라 그러하고 무엇이나 가져도 된다 가진 후 빈 그릇에 허공부스러기쯤 담아 두려거든 그렇게 하여라
이 세상에선 누군가 주는 이 있고 누군가 받는 이도 있다 받아선 내버리거나 서서히 시들게 놔두기도 한다 이런 이 허망이라 한다 허망은 삶의 예삿일이며 이를테면 사람의 식량이다
나는 너를 허망의 짝으로 선택했다 너를 사랑한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명인 시인 / 궁리 외 3편 (0) | 2020.08.25 |
|---|---|
| 정호승 시인 / 안개꽃 외 5편 (0) | 2020.08.25 |
| 강재남 시인 / 몽상인지 망상인지, (0) | 2020.08.24 |
| 박승자 시인 / 새벽시장 (0) | 2020.08.24 |
| 정선희 시인 / 샤르틴 다와* (0) | 2020.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