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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승자 시인 / 새벽시장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24.

박승자 시인 / 새벽시장

 

 

새벽시장, 채소전 지나 어물전 지나

철도역 뒤편에 쪼그리고 앉아 탐스런 무를 팔러 온 아낙 무를 세는 숫자가 자꾸 헷갈린다

 

무 세 개를 네 개라고 우긴다무 하나에 오백 원이면 너무 싸다 싶지만 숫자를 맞추는 버릇이 있는 나는 자꾸 봉지 속을 열어 보였다 막무가내 아낙은 손사래를 치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남편이 지켜보다 못해 담뱃불을 신발 뒤축으로 짓이기고 나선다 무 하나를 봉지에 넣어주면 한 없이 미안한 얼굴을 내민다

 

옆 좌판에서 고추를 파는 이가 “저렇게 아침부터 취해서, 끌끌” 하는 매운 소리에 아낙은 황망한 표정을 짓고 무 다발 쪽으로 기우뚱 등을 돌린다

 

한 오리쯤 취해보고 싶은 날들이 내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한 모금의 물을 마시거나 책을 펼쳐들곤 했다 너는 한 백리 쯤 취하면 어떠냐고 울컥 하기도 했지만 저렇게 취한 이를 따라나서는 남자의 염려가 물기 마른 자국처럼 읽혀져 붉은 마음이 자꾸만 번졌다

 

어느 새, 복작복작 사람들이 밀려들고 추운 이 아침을 건너는 아낙이 부러워 붉은 것을 가라앉히고 울컥,

 

아침을 여는 새소리가 짤랑 짤랑 방울 소리처럼 들렸다

 

웹진 『시인광장』 2012년 12월호 발표

 

 


 

박승자 시인

전남 보성에서 출생. 2000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2011년 《시안》 봄호 신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