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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시인 / 궁리
아무것도 없는 막장에 닿기까지 생각은 얼마나 오래 헤매는가! 샛길로 접어든 마음이 초소 앞을 지날 때 무엇도 탐문할 의사가 없다는 듯 병사는 총을 든 채 잠들어 있다 차단기를 들부수는 궁리여, 어떻게 넘어서야 너의 편애에 다다르겠니? 탄식하는 진자(振子)처럼 내달려도 늘 제자리로 돌아서는 생각들 일몰은 어느새 그 많은 피 다 흘리고 제 크기만큼 사방을 좁혀놓는가 으르렁거릴 때 사나운 짐승이지만 우리 속에선 양순한 어둠 부지불식간에 귀를 바짝 세우지만 궁리는 퀭한 제 귓바퀴나 만지작거릴 뿐!
김명인 시인 / 따뜻한 적막
아직은 제 풍경을 거둘 때 아니라는 듯 들판에서 산 쪽을 보면 그쪽 기슭이 환한 저녁의 깊숙한 바깥이 되어 있다 어딘가 활활 불 피운 단풍 숲 있어 그 불 곁으로 새들 자꾸만 날아가는가 늦가을이라면 어느새 꺼져버린 불씨도 있으니 그 먼 데까지 지쳐서 언 발 적신들 녹이지 못하는 울음소리 오래오래 오한에 떨리라 새 날갯짓으로 시절을 분간하는 것은 앞서 걸어간 해와 뒤미처 당도하는 달이 지척 간에 얼룩지우는 파문이 가을의 심금임을 비로소 깨닫는 일 하여 바삐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같은 하늘에서 함께 부스럭대는 해와 달을 밤과 죽음의 근심 밖으로 잠깐 튕겨두어도 좋겠다 조금 일찍 당도한 오늘 저녁의 서리가 남은 온기를 다 덮지 못한다면 구들 한 장 넓이만큼 마음을 덮혀 놓고 눈물 글썽거리더라도 들판 저쪽을 캄캄해질 때까지 바라봐야 하지 않겠느냐
김명인 시인 / 또 소나기
첫길 나들이가 하필 무밭 천지지만 이 풍성한 유목 시절은 아직 놓아기르는 장마철 몫이어서 반짝 햇살 깃들이기에도 비좁은 난간이라 노란 장다리 날염하듯 소나기 도 한 차례인데 비안개 자욱한 그 길로 박쥐우산 펴들고 霹靂(벽력)에 흠뻑 젖은 노랑나비 한 마리 날아간다 한 바다 노랑 파도에 처질 듯 솟구칠 듯
김명인 시인 / 마음의 정거장
집들고 처마를 이어 키를 낮추는 때 절은 국도변 따라 한 아이가 간다 그리움이여, 마음의 정거장 저편에 널 세워두고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면 저기 밥집 앞에서 제재소 끝으로 허술히 몰려가는 대낮의 먼지바람 십일월인데 한겨울처럼 춥다 햇볕도 구겨질 듯 펄럭이는 이발소 유리창 밖에는 노박으로 떨고 선 죽도화 한 그루 그래도 피우고 지울 잎들이 많아 어느 세월 저 여린 꽃가지 단풍 들고 한 잎씩 저버리고 가야 할 슬픔인듯 잎잎이 놓아버려 텅 비는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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