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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명인 시인 / 궁리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25.

김명인 시인 / 궁리

 

 

아무것도 없는 막장에 닿기까지

생각은 얼마나 오래 헤매는가!

샛길로 접어든 마음이 초소 앞을 지날 때

무엇도 탐문할 의사가 없다는 듯

병사는 총을 든 채 잠들어 있다

차단기를 들부수는 궁리여,

어떻게 넘어서야 너의 편애에 다다르겠니?

탄식하는 진자(振子)처럼 내달려도

늘 제자리로 돌아서는 생각들

일몰은 어느새 그 많은 피 다 흘리고

제 크기만큼 사방을 좁혀놓는가

으르렁거릴 때 사나운 짐승이지만

우리 속에선 양순한 어둠

부지불식간에 귀를 바짝 세우지만

궁리는 퀭한 제 귓바퀴나 만지작거릴 뿐!

 

 


 

 

김명인 시인 / 따뜻한 적막

 

 

아직은 제 풍경을 거둘 때 아니라는 듯

들판에서 산 쪽을 보면 그쪽 기슭이

환한 저녁의 깊숙한 바깥이 되어 있다

어딘가 활활 불 피운 단풍 숲 있어 그 불 곁으로

새들 자꾸만 날아가는가

늦가을이라면 어느새 꺼져버린 불씨도 있으니

그 먼 데까지 지쳐서 언 발 적신들

녹이지 못하는 울음소리 오래오래 오한에 떨리라

새 날갯짓으로 시절을 분간하는 것은

앞서 걸어간 해와 뒤미처 당도하는 달이

지척 간에 얼룩지우는 파문이 가을의 심금임을

비로소 깨닫는 일

하여 바삐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같은 하늘에서 함께 부스럭대는 해와 달을

밤과 죽음의 근심 밖으로 잠깐 튕겨두어도 좋겠다

조금 일찍 당도한 오늘 저녁의 서리가

남은 온기를 다 덮지 못한다면

구들 한 장 넓이만큼 마음을 덮혀 놓고

눈물 글썽거리더라도 들판 저쪽을

캄캄해질 때까지 바라봐야 하지 않겠느냐

 

 


 

 

김명인 시인 / 또 소나기

 

 

첫길 나들이가 하필

무밭 천지지만

이 풍성한 유목 시절은

아직 놓아기르는 장마철

몫이어서

반짝 햇살 깃들이기에도

비좁은 난간이라

노란 장다리 날염하듯

소나기 도 한 차례인데

비안개 자욱한 그 길로

박쥐우산 펴들고 霹靂(벽력)에

흠뻑 젖은

노랑나비 한 마리 날아간다

한 바다 노랑 파도에 처질 듯

솟구칠 듯

 

 


 

 

김명인 시인 / 마음의 정거장

 

 

집들고 처마를 이어 키를 낮추는

때 절은 국도변 따라 한 아이가 간다

그리움이여, 마음의 정거장 저편에 널 세워두고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면

저기 밥집 앞에서 제재소 끝으로

허술히 몰려가는 대낮의 먼지바람

십일월인데 한겨울처럼 춥다

햇볕도 구겨질 듯 펄럭이는 이발소 유리창 밖에는

노박으로 떨고 선 죽도화 한 그루

그래도 피우고 지울 잎들이 많아 어느 세월

저 여린 꽃가지 단풍 들고

한 잎씩 저버리고 가야 할 슬픔인듯

잎잎이 놓아버려 텅 비는 하늘

 

 


 

김명인(金明仁, 1946~ ) 시인

경북 울진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 경기대 국문과 교수를 거쳐 현재 고려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 1973년 『중앙일보』 신춘 문예에 「출항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1973』 동인을 거친 그는 김창완 · 이동순 · 정호승 등과 함께 『반시』 동인에 참여해 왕성한 작품 활동을 벌임. 그는 이제까지 『동두천』(1979) · 『머나먼 곳 스와니』(1988) · 『물 건너는 사람』(1992) · 『푸른 강아지와 놀다』(1994) · 『바닷가의 장례』(1996) · 『길의 침묵』(1999) 등 여섯 권의 시집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