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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령 시인 / 곡비(哭婢)
비만큼 나는 쉽게 읽힌다 무슨 연주되기도 전 파쇄 된 악보처럼 맥없는, 가락이어서 푹 젖지도 못 하는 수직 묘경妙境의 합주인 냥 종일 비가 온다 원시의 층리인가 달무리 가르며 쏟아지는 숱한 문장들 사라졌다 다시 뜨는 부록과 반복되는 밤의 헌사들 어느새 하늘병풍이 빼곡한 질문들을 찍어 내고 그 부호들을 타전하듯 비는 온몸으로 운다 울음을 덧대면 웃음은 기록이 되고 그 심중을 더듬는 길 하릴없음을 그대는 아는가 그대의 울음을 등에 지고 가는 그대들이 근근하듯이 태생 나는 불립문자로 우기를 견디었으니 바람에 홀려 굽이치면서 저 비구름도 제 곡조에 못 이겨 이울겠거니 반복되는 연주도 소리를 낮춰야만 건기를 불러오거니 수직의 득음인 듯 수척한 하늘에 얼룩진 표정들을 마저 거두어가는 비가(悲歌), 다음 생으로 들 듯 차분히 목청을 다듬고 있다 쉬이 젖는 내가, 나를 간파한 비만큼 흥건하다
계간 『서정시학』 2019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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