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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령 시인 / 곡비(哭婢)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14.

이령 시인 / 곡비(哭婢)

 

 

  비만큼 나는 쉽게 읽힌다

  무슨 연주되기도 전 파쇄 된 악보처럼

  맥없는, 가락이어서 푹 젖지도 못 하는

  수직 묘경妙境의 합주인 냥 종일 비가 온다

  원시의 층리인가

  달무리 가르며 쏟아지는 숱한 문장들

  사라졌다 다시 뜨는 부록과 반복되는 밤의 헌사들

  어느새 하늘병풍이 빼곡한 질문들을 찍어 내고

  그 부호들을 타전하듯 비는 온몸으로 운다

  울음을 덧대면 웃음은 기록이 되고

  그 심중을 더듬는 길 하릴없음을 그대는 아는가

  그대의 울음을 등에 지고 가는 그대들이 근근하듯이

  태생 나는 불립문자로 우기를 견디었으니

  바람에 홀려 굽이치면서 저 비구름도 제 곡조에 못 이겨 이울겠거니

  반복되는 연주도 소리를 낮춰야만 건기를 불러오거니

  수직의 득음인 듯

  수척한 하늘에 얼룩진 표정들을 마저 거두어가는

  비가(悲歌), 다음 생으로 들 듯 차분히 목청을 다듬고 있다

  쉬이 젖는 내가,

  나를 간파한 비만큼 흥건하다

 

계간 『서정시학』 2019년 가을호 발표

 

 


 

이령 시인

경북 경주에서 출생. 2013년 《시사사》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 2015년 한중작가 공동시집 『망각을 거부하며』출간. 시집으로 『시인하다』와 『삼국유사 대서사시』가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부주간, 동리목월기념사업회 이사, 경북혁신포용포럼사무국장, 문학동인Volume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