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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란 시인 / 가구음악
부탁하지 않은 일은 하지 마셔요, 쐐기풀엄마 나는 더 이상 아기가 아니에요
이마가 볼록 튀어나온 장미가 손을 뿌리쳐요 장미의 혀에 찔린 쐐기풀밭 장미의 배경으로 흘러다니는 쐐기풀의 노래 낮은음자리표 위에서, 장미가 옳아요
벼락 치는 밤, 번개를 품은 후 쐐기풀은 더 이상 쐐기풀일 수 없어 쐐기풀의 가늘고 야윈 몸은 더 이상 부풀 수 없을 때까지 부풀어 쐐기풀 안에 쐐기풀은 없어, 장미가 옳아요
넓은 세상으로 나갈 거예요, 쐐기풀엄마 이 옷장은 너무 갑갑해요
쐐기풀의 심장을 찢고 나오는 장미향기 꽃구름 이마, 분홍조개 귀, 달삭달삭 입술 말랑한 손톱 발톱, 장미가 옳아요
장미의 부탁을 기다리지 않았기에 장미의 뺨은 더 이상 분홍일 수 없는 분홍
장미의 부탁을 기다려야 한다면 레일과 손잡이가 망가진 쐐기풀서랍은 언제나 장미를 낳을 수 있을까요
최정란 시인 / 강물재판
아프리카 어떤 부족은 살인사건이 있고 일 년이 지나면
범인을 강물에 들어가게 한다 슬픔의 시간을 보낸 피해자 가족은 그를 물 속에서 나오지 못하게 깊이 밀어 넣을 수도 있고 그를 용서하고 물 밖으로 나오게 할 수도 있다 그를 죽게 내버려두면 평생을 슬픔 속에 살게 되고 그를 용서하면 행복이 온다 낮 꿈에도 가위눌려 허우적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나는 누구를 용서하지 않은 것일까 누구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일까 사소한 일상의 재판으로 얼마나 자주 스스로를 가두는 판결을 내렸던가
최정란 시인 / 공중사원
어린 기도가 흙에 잔뿌리 내릴 때 뿌리 아래 긴 공중이 생길 줄 알았을까요
그래도 우리는 꽃을 피웁시다
문 없는 출구와 바닥과 아치형 천장, 긴 바람의 건축물 제 발 밑에 세워진 줄 꽃은 영원히 모를지라도
누군가 비우는 자리를 빠르게 채우는 것이 공중이라는 것은 시간의 내부를 훑고 가는 바람이라는 것은 얼마나 다행입니까 빈자리를 빈 채로 두는 것은 얼마나 쓸쓸한 다행입니까
모래밭에 올라와 죽은 고래 뼈 궁륭처럼 내장을 파낸 거대한 짐승처럼 반 원통형 공중이 흙의 빈자리를 채웁니다 흙의 내부가 텅 비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오랫동안 작심하고 기다린 듯
바닥 없는 시간의 궁륭 아무도 머물지 않고 빠르게 통과해야 하더라도 뿌리가 움켜쥔 삶의 검은 속살이 시간의 바람에 속절없이 밀려 나가는 공허를 모르더라도 우리의 기도는 꽃 피는 일에 몰입합시다
뿌리를 뒤흔드는 진동에도, 밤낮 없이 달리는 차들 행렬에도 향기로운 침묵과 바람의 예배는 벼랑 위의 뿌리를 다시 흙의 경전에 박아 넣을 것입니다
바닥을 뚫고 가는 굴착기 진동에 놀라 떨던 꽃받침도 세상의 진동과 소음에 익숙해지고 뿌리내릴 깊이가 없어진 뿌리깊은 검은 바람도 내일 떠나도 미련 없는 삶을 웃으며 견디는 뿌리의 깊이한계선도 무심한 일상이 되겠지만
흙도 공중도 서로의 어둠에 익숙해지자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제 한계를 먼저 설정하고 꽃 피우는 슬픔은 바닥이 없으니 우리는 다만
서로 다른 장르 출신들답게 제각기 간절한 기도로 꽃을 밀어 올립시다 고래의 숨처럼 꽃을 피웁시다 거대한 삶의 바다에서 물 위로 머리를 내밀어 숨을 몰아쉬듯이 꽃을 몰아쉽시다
이따금 분수처럼 쏟아지는 꽃의 불면이 견고한 믿음의 바닥을 꿰뚫고 솟아오르겠지만 꽃의 입구는 당분간 온몸 흔들려도 좋을 것입니다 가시 한 점 남김없이 흔들려도 좋을 것입니다
꽃의 허공을 뚫고 들어오는 신앙심 깊은 차들 묵음으로 속도를 늦출 것입니다
꽃의 십자가에는 아직 가시가 많고 꽃봉오리인 어린 신께서 주무실 시간이므로 대지의 숨구멍으로 드나드는 천사의 날개 고요할 것입니다
바람 위에 떠 있는 이 사원은 어떤 장르일까요 꽃은 어떤 장르로 허공의 진화를 거듭할까요 이 허공에서 꽃은 얼마나 간절한 기도의 사원이 될까요
질문과 질문을 끌고 대지의 들숨과 날숨, 길게 교행할 것입니다
최정란 시인 / 그 해 여름
장마가 오기 전에 엄마는 이층에서 굴러 내려오고 엄마가 누워서 꼼짝달싹 못하는 동안 쌀통에서는 쌀벌레가 날아오르고 계단에는 모서리마다 이끼가 파랗게 피었다 마당에 온갖 꽃들을 심어놓은 엄마가 꽃처럼 심겨진 침대는 엄마를 심은 인공정원, 엄마가 심긴 화단 담벼락을 타고 줄장미 덩굴이 올라가고 꽃은 아픈 줄도 모르나 엄마 팔에서 덩굴손처럼 돋아난 링거 줄이 올라가고 엄마, 장마가 너무 오래 가요 빗소리를 들으며 담벼락을 뒤덮은 줄장미가 지는 동안, 여름방학 보충수업을 빼먹은 나는 언니의 바지를 늘리는데, 재봉틀 소리가 처마 밑에 낙숫물 자국처럼 점점이 파인다 내 키는 언제까지 자라나, 엄마는 날마다 누워있고 엄마가 누워서 천정만 바라보는 동안 나도 언젠가는 엄마가 될 텐데, 딸은 엄마 닮는다는데 나도 저렇게 몸 안에 갇히게 되면 어쩌나 엄마는 정신이 초롱초롱해서 몸이 감옥이고 나는 내 발로 위층 아래층 쫓아다니지만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언니도 오빠도 말 해주지 않고, 여름 내내 대문 밖에도 나가지 않고 집안에 안전하게 담겨 있는 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스무 살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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