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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승자 시인 / 밤 부엉이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14.

최승자 시인 / 밤 부엉이

 

 

밤부엉이 한 마리가 창가에서

나를 꼬나보기 시작했어.

나는 허둥거리며 내 몸의

모든 기관들을 닫아 버렸지만

부엉이의 눈빛이 오토머신처럼

내 몸 구석구석을 헤집어 열고

노란 방사선을 쏘아 부었어.

나는 사지를 늘어뜨린 채

천천히, 차갑게 융해되어 갔어.

 

이윽고 잠, 닫혀진 회색 강철 바다,

속으로 한 사내의 그림자가 숨어들어

내 꿈의 뒷전을 어지러이 배회하고

환각처럼 들리는 창가에서, 누구시죠?

내게 희미한 두통과 고통을 흘러 붓는, 누구시죠?

내 死産의 침상에 낮게 가라앉아,

누구시죠? 누구 누구 누구……?

 

밤부엉이가 밤새 내 지붕을 파먹었어.

아침엔 날이 흐렸고

벌어진 큰골 속으로 빗물이 흘러들었어.

이미 죽은 내 몸뚱이 위에

누군가 줄기차게 오줌을 깔기고,

휘파람을 불며 유유히 떠나갔어.

 

 


 

 

최승자 시인 / 비극

 

 

죽고 싶음의 절정에서

죽지 못한다, 혹은

죽지 않는다.

드라마가 되지 않고

비극이 되지 않고

클라이막스가 되지 않는다.

되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견뎌내야 할 비극이다.

시시하고 미미하고 지지하고 데데한 비극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 물을 건너갈 수밖에 없다.

맞은편에서 병신 같은 죽음이 날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최승자 시인 / 빈배처럼 텅 비어

 

 

내 손가락들 사이로

내 의식의 층층들 사이로

세계는 빠져나갔다

그리고도 어언 수천 년

 

빈배처럼 텅 비어

나 돌아갑니다

 

 


 

 

최승자 시인 / 살았능가 살았능가

 

 

살았능가 살았능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

대답하라는 소리

살았능가 살았능가

죽지도 않고 살아 있지도 않고

벽을 두드리는 소리만

대답하라는 소리만

살았능가 살았능가

 

삶은 무지근한 잠

오늘도 하늘의 시계는

흘러가지 않고 있네

 

 


 

 

최승자 시인 / 생각은

 

 

생각은 마음에 머물지 않고

마음은 몸에 깃들이지 않고

몸은 집에 거하지 않고

집은 항상 길 떠나니,

 

생각이 마음을 짊어지고

마음이 몸을 짊어지고

몸이 집을 짊어지고

그러나 집 짊어진 몸으로

무릉도원 찾아 길 떠나니,

 

그 마음이 어떻게 천국을 찾을까.

 

무게 있는 것들만 데불고,

보이는 것들만 보면서,

시야에 빽빽한 그 형상들과

그것들의 빽빽한 중력 사이에서

 

어떻게 길 잃지 않고

허방에 빠지지 않고

귀향할 수 있을까.

 

제가 몸인 줄로만 아는 생각이

어떻게 제 출처였던

마음으로 귀향할 수 있을까.

 

 


 

최승자(1952년 ~ ) 시인

1952년 충남 연기에서 출생. 서울의 수도여고를 거친 그는 1971년 고려대학교 독문과에 입학. 고려대 재학중 교지 『고대문화』의 편집장을 맡은 최승자는 유신 시대에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가 학교에서 쫓겨난다. 그 후 학교 선배인 정병규가 주간으로 있던 ‘홍성사' 편집부에 들어간다. 최승자는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에 「우리 시대의 사랑」 등 몇 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옴. 홍성사를 그만둔 그는 이후 번역 문학가로 활동하며 시 쓰기에 전념하며 1993년에는 미국 아이오와대학교 창작 프로그램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다섯 권의 시집을 냈다. 『이 시대의 사랑』(1981) · 『즐거운 일기』(1984)· 『기억의 집』(1989) · 『내 무덤, 푸르고』(1993) · 『연인들』(1998)이다.

2001년 이후 투병을 하면서 시작 활동을 한동안 중단했다가 다시 시를 발표했다. 2010년 《쓸쓸해서 머나먼(문학과지성사)》 , 2016년 《빈 배처럼 텅 대중적인 인기를 얻어 박노해, 황지우, 이성복 등과 함께 시의 시대 80년대가 배출한 스타 시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2010년 : 제18회 대산문학상. 2010년 : 제5회 지리산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