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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도종환 시인 / 아홉 가지 기도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14.

도종환 시인 / 아홉 가지 기도

 

 

나는 지금 나의 아픔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직 나의 아픔만으로 기도하지 않게 하소서

나는 지금 나의 절망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직 나의 절망만으로 기도하지 않게 하소서

나는 지금 깊은 허무에 빠져 기도합니다

그러나 허무 옆에 바로 당신이 계심을 알게 하소서

나는 지금 연약한 눈물을 뿌리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남을 위해 우는 자 되게 하소서

나는 지금 죄와 허물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또 다시 죄와 허물로 기도하지 않게 하소서

나는 지금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모든 내 이웃의 평화를 위해서도

늘 기도하게 하소서

나는 지금 영원한 안식을 기도합니다

그러나 불행한 모든 영혼을 위해 항상

기도하게 하소서

나는 지금 용서받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자 되게 하소서

나는 지금 굳셈과 용기를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더욱

바르게 행할 수 있는 자 되게 하소서...

 

 


 

 

도종환 시인 / 어떤 날

 

 

어떤 날은 아무 걱정도 없이

풍경소리를 듣고 있었으면

바람이 그칠 때까지 듣고 있었으면

어떤 날은 집착을 버리듯 근심도

버리고 홀로 있었으면

바람이 나뭇잎을 다 만나고 올 때까지

홀로 있었으면

바람이 소쩍새 소리를 천천히 가지고 되오는 동

안 밤도 오고

별 하나 손에 닿는 대로 따다가 옷섶으로

닦고 도 닦고 있었으면

어떤 날은 나뭇잎처럼 즈믄 번뇌의

나무에서 떠나 억겹의 강물 위를

소리 없이

누워 흘러갔으면 무념 무상 흘러갔으면

 

 


 

 

도종환 시인 / 어떤 편지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만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만이

한 사람의 아픔도 외면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처음 만난 그 숲의 나무들이 시들고

눈발이 몇 번씩 쌓이고 녹는 동안

나는 한번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나던 그때는

내가 사랑 때문에 너무도 아파하였기 때문에

당신의 아픔을 사랑할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헤어져 돌아와 나는

당신의 아픔 때문에 기도했습니다.

당신을 향하여 아껴온

나의 마음을 당신도 알고 계십니다.

당신의 아픔과 나의 아픔이 만나

우리 서로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생각합니다.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동안은 행복합니다.

진실로 모든 이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줄 수 있는 동안은 행복합니다.

 

 


 

 

도종환 시인 / 어릴 때 내 꿈은

 

 

어릴 때 내 꿈은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뭇잎 냄새나는 계집애들과

먹 머루 빛 눈 가진 초롱초롱한 사내 녀석들에게

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려주며

창 밖의 햇살이 언제나 교실 안에도 가득한

그런 학교의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플라타너스 아래 앉아 시들지 않는 아이들의

얘기도 들으며

하모니카 소리에 봉숭아꽃 한 잎씩 열리는

그런 시골학교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는 자라서 내 꿈대로 선생이 되었어요.

그러나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침묵과 순종을 강요하는

그런 선생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밤늦게까지 아이들을 묶어놓고 험한 얼굴로 소리치며

재미없는 시험문제만 풀어주는

선생이 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그럴 듯하게

아이들을 속여넘기는

그런 선생이 되고자 했던 것은 정말 아니었어요.

아이들이 저렇게 목숨을 끊으며 거부하는데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편이 되지 못하고

억압하고 짓누르는 자의 편에 선 선생이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아직도 내 꿈은

아이들의 좋은 선생님이 되는 거예요.

물을 건너지 못하는 아이들 징검다리 되고 싶어요.

길을 묻는 아이들 지팡이 되고 싶어요.

헐벗은 아이들

언 살을 싸안는 옷 한 자락 되고 싶어요.

푸른 보리처럼 아이들이 쑥쑥 자라는 동안

가슴에 거름을 얹고 따뜻하게

썩어 가는 봄 흙이 되고 싶어요.

 

 


 

 

도종환 시인 / 여린 가지

 

 

가장 여린 가지가 가장 푸르다.

둥치가 굵어지면 나무껍질은 딱딱해 진다.

몸집이 커질수록 움직임은 둔해지고

줄기는 나날이 경직되어 가는데

허공을 향해 제 스스로 뻗을 곳을 찾아야 하는

줄기 맨 끝 가지들은 한 겨울에도 푸르다

모든 나무들이 자정에서 새벽까지 견디느라

눈비 품은 잿빛 하늘처럼

점점 어두운 얼굴로 변해가도

북풍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가지는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엄동에도 초록이다.

해마다 꽃망울은 그 가지에 잡힌다.

 

 


 

도종환 시인

1954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충북대 국어교육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 1984년《분단시대》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두미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람의 마릉에 꽃이 진다』,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 등이 있고, 산문집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 『그대 가슴에 뜨는 나뭇잎배』,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모과』, 『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 등과 동화 『바다유리』 등이 있음. 1997년 제7회 민족예술상 수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