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임희숙 시인 / 붉은 새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13.

임희숙 시인 / 붉은 새

 

 

  블루가 반나절 가출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블루는 중성화수술을 받은 샴고양이입니다

  털에서는 초코향이 나고 검은 장화를 신은 듯 멋진 다리를 가졌지요

  고양이로 태어났지만 오로지 사람만 아는 녀석이었습니다

  어두운 화단 구석에서 블루를 찾았을 때

  얼룩무늬 길고양이와 친구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 온 블루는 그날도 다음 날도 잠만 잤습니다

  곁에 누우면 슬며시 일어나 내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창문 쪽을 향해 하염없이 앉아있었습니다

  그날 길고양이는 우리 블루에게 무슨 말을 한 것일까요

 

  블루야 나도 예전엔 붉은 새였다

  지금처럼 커다랗고 못난 사람이 아니라 작고 예쁜 소리를 가졌었지

  나는 숲속을 날아다니는 작은 새였고 너는 새를 쫓는 귀여운 사내아이였고

  네가 아름다운 사향노루였을 때 나는 공중에 집을 짓는 까막딱다구리였으며

 

  블루가 다가와 내 무릎에 이마를 문지릅니다

  그리고 하늘같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봅니다

  블루의 두 눈은 숲속 호수처럼 맑고 깊습니다

  사실 붉은 새였다고 말할 때 나도 이미 젖어 있었습니다

  불쑥 나온 말이었는데 온몸에 전율이 오더니 심장이 저렸습니다

  사흘 동안 누워만 있던 블루의 심장도 그런 그리움에 닿았던 것일까요

  그리고 나는 정말 붉은 새였을까요

 

웹진 『시인광장』 2012년 9월호 발표

 

 


 

임희숙 시인

서울에서 출생. 1991년 《시대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격포에 비 내리다』(하늘연못, 1999)와 『나무 안에 잠든 명자씨』(시안, 2011)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