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희숙 시인 / 붉은 새
블루가 반나절 가출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블루는 중성화수술을 받은 샴고양이입니다 털에서는 초코향이 나고 검은 장화를 신은 듯 멋진 다리를 가졌지요 고양이로 태어났지만 오로지 사람만 아는 녀석이었습니다 어두운 화단 구석에서 블루를 찾았을 때 얼룩무늬 길고양이와 친구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 온 블루는 그날도 다음 날도 잠만 잤습니다 곁에 누우면 슬며시 일어나 내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창문 쪽을 향해 하염없이 앉아있었습니다 그날 길고양이는 우리 블루에게 무슨 말을 한 것일까요
블루야 나도 예전엔 붉은 새였다 지금처럼 커다랗고 못난 사람이 아니라 작고 예쁜 소리를 가졌었지 나는 숲속을 날아다니는 작은 새였고 너는 새를 쫓는 귀여운 사내아이였고 네가 아름다운 사향노루였을 때 나는 공중에 집을 짓는 까막딱다구리였으며
블루가 다가와 내 무릎에 이마를 문지릅니다 그리고 하늘같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봅니다 블루의 두 눈은 숲속 호수처럼 맑고 깊습니다 사실 붉은 새였다고 말할 때 나도 이미 젖어 있었습니다 불쑥 나온 말이었는데 온몸에 전율이 오더니 심장이 저렸습니다 사흘 동안 누워만 있던 블루의 심장도 그런 그리움에 닿았던 것일까요 그리고 나는 정말 붉은 새였을까요
웹진 『시인광장』 2012년 9월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도종환 시인 / 아홉 가지 기도 외 4편 (0) | 2020.08.14 |
|---|---|
| 한명희 시인 / 새가 된 아내 (0) | 2020.08.13 |
| 강문숙 시인 / 땡볕사원(寺院) (0) | 2020.08.13 |
| 이윤택 시인 / 시처럼 그림처럼 (0) | 2020.08.13 |
| 이은봉 시인 / 시간의 덫 (0) | 2020.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