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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봉 시인 / 시간의 덫
황혼이 날개를 펴는 오후였네 저녁볕 환하게 번지는 둔산 터미널에서 고속버스는 멈췄네
느릿느릿 바람이 불고, 주춤주춤 송이눈이 부서져 내렸네
누구를 기다리는 것인가 두리번거리며 눈길 위로 발자국을 떼었네 그러는 동안 눈앞을 지나가는 것은 앙상한 가로수들뿐이었네
바로 그때였네 버석대는 낙엽 밟는 소리와 함께 당신은 왔네 시나브로 열리는 자동차의 창……
갑자기 30년이 넘는 시간이 열리고, 여름 숲 같은 당신은, 당신의 자동차는 나를 싣고 달렸네
계룡으로 논산으로 회인으로 보은으로 금산으로…… 지난 시대를 향해 달리는 속도에 좇기면서도 참을 수 없는 열정은 자꾸만 꽃을 피웠네
지는 꽃향기 속에서도 그대와 나는 무언가 되고 싶었을까
잎사귀를 떨구고 서 있는 은행나무 아래서, 절벽을 타고 흐르는 폭포 아래에서 나는 그대의, 그대는 나의 집이 되고 싶었을까
끝내는 시간의 덧에 갇혀 집은커녕 문도 되지 못했네
걸음마다 불덩어리를 앓다가는 고개를 돌리고 떠나왔던 길로, 둔산 터미널로 되돌아와야 했네
그때의 황홀만은 잊지 말아야지 소중하게 간직해야지 다짐이나 했을 뿐이네
황혼이 검은 날개를 펴지 않더라도 뿌옇게 안개가 끼어 있어 더는 갈 곳이 없었네
계속해서 흙탕물 속을 헤엄치다 보니 너무 지쳤네 아가미가 없어 숨 쉴 수조차 없었네
손사래 대신 봄꽃을 흔들더라도 그때 그 1970년대는 다시 오지 않았네
당신은 흐느껴 울고, 나는 당신의 등을 두드리다가 어느덧 시간의 덫에 갇히고 말았네 시간의 발자국에……
어떤 절망이 시간을 이길 수 있을까 황혼의 검은 날갯짓 속에서는 자꾸만 한숨이 새어나왔네.
웹진 『시인광장』 2012년 8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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