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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인 / 만들 수만 있다면
만들 수만 있다면 아름다운 기억만을 만들며 삽시다. 남길 수만 있다면 부끄럽지 않은 기억만을 남기며 삽시다.
가슴이 성에 낀 듯 시리고 외로웠던 뒤에도 당신은 차고 깨끗했습니다. 무참히 짓밟히고 으깨어진 뒤에도 당신은 오히려 당당했습니다 사나운 바람 속에서 풀잎처럼 쓰러졌다가도 우두둑 우두둑 다시 일어섰습니다.
꽃 피던 시절의 짧은 기쁨보다 꽃 지고 서리 내린 뒤의 오랜 황량함 속에서 당신과 나는 가만히 손을 잡고 마주서서 적막한 한세상을 살았습니다. 돌아서 뉘우치지 맙시다 밤이 가고 새벽이 온 뒤에도 후회하지 맙시다.
만들 수만 있다면 아름다운 기억만을 만들며 삽시다.
도종환 시인 / 맑은 물
맑은 물은 있는 그대로를 되비쳐 준다 만상에 꽃이 피는 날 산의 모습은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보여주고 잎 하나 남지 않고 모조리 산을 등지는 가을날은 쓸쓸한 모습 그대로를 보여 준다. 푸른 잎들이 다시 돌아오는 날은 돌아오는 모습 그대로 새들이 떠나는 날은 떠나는 모습 그대로 더 화려하지도 않게 구태여 더 미워하지도 않는다 당신도 그런 맑은 물 고이는 날 있었는가 가을 오고 겨울 가는 수많은 밤이 간 뒤 오히려 더욱 맑게 고이는 그대 모습 만나지 않았는가
도종환 시인 / 비 내리는 밤
빗방울은 장에 와 흐득이고 마음은 찬 허공에 흐득인다 바위 벼랑에 숨어서 젖은 몸으로 홀로 앓는 물새 마냥 이레가 멀다하고 잔병으로 눕는 날이 잦아진다.
별마다 모조리 씻겨 내려가고 없는 밤 천리 만길 먼 길에 있다가 한 뼘 가까이 내려오기도 하는 저승을 빗발이 가득 메운다.
도종환 시인 / 사랑의 길
나는 처음 당신의 말을 사랑하였지 당신의 물빛 웃음을 사랑하였고 당신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였지 당신을 기다리고 섰으면 강 끝에서 나뭇잎 냄새가 밀려오고 바람이 조금만 빨리 와도 내 몸은 나뭇잎 소리를 내며 떨렸었지 몇 차례 겨울이 오고 가을이 가는 동안 우리도 남들처럼 아이들이 크고 여름 숲은 깊었는데 뜻밖에 어둡고 큰 강물 밀리어 넘쳐 다가갈 수 없는 큰물 너머로 영영 갈라져버린 뒤론 당신으로 인한 가슴 아픔과 쓰라림을 사랑하였지 눈물 한 방울까지 사랑하였지 우리 서로 나누어 가져야 할 깊은 고통도 사랑하였고 당신으로 인한 비어있음과 길고도 오랠 가시밭길도 사랑하게 되었지.
도종환 시인 / 사연
한평생을 살아도 말 못하는 게 있습니다. 모란이 그 짙은 입술로 다 말하지 않듯 바다가 해일로 속을 다 드러내 보일 때도 해초 그 깊은 곳은 하나도 쏟아 놓지 않듯 사랑의 새벽과 그믐밤에 대해 말 안하는 게 있습니다 한평생을 살았어도 저 혼자 노을 속으로 가지고 가는 아리고 아픈 이야기들 하나씩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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