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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도종환 시인 / 만들 수만 있다면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13.

도종환 시인 / 만들 수만 있다면

 

 

만들 수만 있다면

아름다운 기억만을 만들며 삽시다.

남길 수만 있다면

부끄럽지 않은 기억만을 남기며 삽시다.

 

가슴이 성에 낀 듯 시리고 외로웠던 뒤에도

당신은 차고 깨끗했습니다.

무참히 짓밟히고 으깨어진 뒤에도

당신은 오히려 당당했습니다

사나운 바람 속에서 풀잎처럼 쓰러졌다가도

우두둑 우두둑 다시 일어섰습니다.

 

꽃 피던 시절의 짧은 기쁨보다

꽃 지고 서리 내린 뒤의 오랜 황량함 속에서

당신과 나는 가만히 손을 잡고 마주서서

적막한 한세상을 살았습니다.

돌아서 뉘우치지 맙시다

밤이 가고 새벽이 온 뒤에도 후회하지 맙시다.

 

만들 수만 있다면

아름다운 기억만을 만들며 삽시다.

 

 


 

 

도종환 시인 / 맑은 물

 

 

맑은 물은 있는 그대로를 되비쳐 준다

만상에 꽃이 피는 날 산의 모습은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보여주고

잎 하나 남지 않고 모조리 산을 등지는 가을날은

쓸쓸한 모습 그대로를 보여 준다.

푸른 잎들이 다시 돌아오는 날은 돌아오는 모습

그대로 새들이 떠나는 날은 떠나는 모습 그대로

더 화려하지도 않게 구태여 더 미워하지도 않는다

당신도 그런 맑은 물 고이는 날 있었는가

가을 오고 겨울 가는 수많은 밤이 간 뒤

오히려 더욱 맑게 고이는 그대 모습 만나지 않았는가

 

 


 

 

도종환 시인 / 비 내리는 밤

 

 

빗방울은 장에 와 흐득이고

마음은 찬 허공에 흐득인다

바위 벼랑에 숨어서 젖은 몸으로 홀로 앓는

물새 마냥 이레가 멀다하고

잔병으로 눕는 날이 잦아진다.

 

별마다 모조리 씻겨 내려가고 없는 밤

천리 만길 먼 길에 있다가

한 뼘 가까이

내려오기도 하는 저승을 빗발이 가득 메운다.

 

 


 

 

도종환 시인 / 사랑의 길

 

 

나는 처음 당신의 말을 사랑하였지

당신의 물빛 웃음을 사랑하였고

당신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였지

당신을 기다리고 섰으면

강 끝에서 나뭇잎 냄새가 밀려오고

바람이 조금만 빨리 와도

내 몸은 나뭇잎 소리를 내며 떨렸었지

몇 차례 겨울이 오고 가을이 가는 동안

우리도 남들처럼 아이들이

크고 여름 숲은 깊었는데

뜻밖에 어둡고 큰 강물 밀리어 넘쳐

다가갈 수 없는 큰물 너머로

영영 갈라져버린 뒤론

당신으로 인한

가슴 아픔과 쓰라림을 사랑하였지

눈물 한 방울까지 사랑하였지

우리 서로 나누어 가져야 할

깊은 고통도 사랑하였고

당신으로 인한 비어있음과

길고도 오랠 가시밭길도 사랑하게 되었지.

 

 


 

 

도종환 시인 / 사연

 

 

한평생을 살아도 말 못하는 게 있습니다.

모란이 그 짙은 입술로 다 말하지 않듯

바다가 해일로 속을 다 드러내 보일 때도

해초 그 깊은 곳은 하나도 쏟아 놓지 않듯

사랑의 새벽과 그믐밤에 대해 말 안하는 게 있습니다

한평생을 살았어도 저 혼자 노을 속으로 가지고 가는

아리고 아픈 이야기들 하나씩 있습니다.

 

 


 

도종환 시인

1954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충북대 국어교육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 1984년《분단시대》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두미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람의 마릉에 꽃이 진다』,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 등이 있고, 산문집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 『그대 가슴에 뜨는 나뭇잎배』,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모과』, 『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 등과 동화 『바다유리』 등이 있음. 1997년 제7회 민족예술상 수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