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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나희덕 시인 / 정신적인 귀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13.

나희덕 시인 / 정신적인 귀

 

 

어디에 두고 왔을까

두 귀

 

돋보기가 빛을 모으듯

소리를 끌어모아 어루만지던 귀

 

소리의 혈맥을 더듬어

그 통점과 경락을 찾아내던 귀

 

허공의 거미줄을 따라

미세한 움직임에도 흔들리던 귀

 

어느 순간 먹먹해졌다

귓바퀴는 멈추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피아노에 갇힌 건반처럼

정신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난청과 실어증의 나날,

바람이 헛되이 녹슨 현들 울리고 간다

 

 


 

 

나희덕 시인 / 젖지 않는 마음

 

 

여기에 내리고

거기에는 내리지 않는 비

당신은 그렇게 먼 곳에 있습니다

지게도 없이

자기가 자기를 버리러 가는 길

길가의 풀들이나 스치며 걷다 보면

발 끝에 쟁쟁 깨지는 슬픔의 돌멩이 몇개

그것마저 내려놓고 가는 길

오로지 젖지 않는 마음 하나

어느 나무그늘 아래 부려두고 계신가요

여기에 밤새 비 내려

내 마음 시린 줄도 모르고 비에 젖었습니다

젖는 마음과 젖지 않는 마음의 거리

그렇게 먼 곳에서

다만 두 손 비비며 중얼거리는 말

그 무엇으로도 돌아오지 말기를

거기에 별빛으로나 그대 총총 뜨기를

 

 


 

 

나희덕 시인 / 한 포기의 집

 

 

장마가 들이닥치기 전

배추를 거두려고 서두르는 손

잎을 들출 때마다

한 포기씩 뽑힐 때마다

수룩수룩 딸려나오는 목숨들,

잎부터 뿌리까지 한 틈바구니도 남기지 않고

푸른 지붕 아래 오글오글 정들어 살던

온갖 날것과 기어가는 것들이여.

 

한 목숨에 붙은 목숨들

이리도 많다니!

 

한 포기의 배추가

실은 한 채의 집이었다는 걸 안다 해도

장마 오기 전 서두르는 손들,

더 멀리 날아가는 날개들,

흙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드는 작은 발들.

 

 


 

 

나희덕 시인 / 흐린 날에는

 

 

너무 맑은 날 속으로만 걸어왔던가

습기를 견디지 못하는 마음이여

썩기도 전에

이 악취는 어디서 오는지,

바람에 나를 널어 말리지 않고는

좀더 가벼워지지 않고는

그 습한 방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바람은 칼날처럼 깊숙이,

꽂힐 때보다 빠져나갈 때 고통은 느껴졌다.

나뭇잎들은 떨어져나가지 않을 만큼만 바람에 몸을 뒤튼다.

저렇게 매달려서, 견디어야 하나

구름장 터진 사이로 잠시 드는 햇살

그러나, 아, 나는 눈부셔 바라볼 수 없다.

큰 빛을 보아버린 두 눈은

그 빛에 멀어서 더듬거려야 하고

너무 맑게만 살아온 삶은

흐린 날 속을 오래오래 걸어야 한다.

그래야 맞다, 나부끼다 못해

서로 뒤엉켜 찢겨지고 있는

저 잎새의 날들을 넘어야 한다.

 

 


 

 

나희덕 시인 / 흔들리는 것들

 

 

저 가볍게 나는 하루살이에게도

삶의 무게는 있어

마른 쑥풀 향기 속으로

툭 튀어오르는 메뚜기에게도

삶의 속도는 있어

코스모스 한 송이가 허리를 휘이청 하며

온몸으로 그 무게와 속도를 받아낸다.

어느 해 가을인들 온통

들리는 것 천지 아니었으랴

바람에 불려가는 저 잎새 끝에도 온기는 남아 있어

생명의 물기 한점 흐르고 있어

나는 낡은 담벼락이 되어 그 눈물을 받아내고 있다.

 

 


 

나희덕 시인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그녀에게』, 『파일명 서정시』등과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 접시의 시』 등과 산문집 『반통의 물』, 『저 불빛들을 기억해』,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가 있음.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