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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시인 / 정신적인 귀
어디에 두고 왔을까 두 귀
돋보기가 빛을 모으듯 소리를 끌어모아 어루만지던 귀
소리의 혈맥을 더듬어 그 통점과 경락을 찾아내던 귀
허공의 거미줄을 따라 미세한 움직임에도 흔들리던 귀
어느 순간 먹먹해졌다 귓바퀴는 멈추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피아노에 갇힌 건반처럼 정신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난청과 실어증의 나날, 바람이 헛되이 녹슨 현들 울리고 간다
나희덕 시인 / 젖지 않는 마음
여기에 내리고 거기에는 내리지 않는 비 당신은 그렇게 먼 곳에 있습니다 지게도 없이 자기가 자기를 버리러 가는 길 길가의 풀들이나 스치며 걷다 보면 발 끝에 쟁쟁 깨지는 슬픔의 돌멩이 몇개 그것마저 내려놓고 가는 길 오로지 젖지 않는 마음 하나 어느 나무그늘 아래 부려두고 계신가요 여기에 밤새 비 내려 내 마음 시린 줄도 모르고 비에 젖었습니다 젖는 마음과 젖지 않는 마음의 거리 그렇게 먼 곳에서 다만 두 손 비비며 중얼거리는 말 그 무엇으로도 돌아오지 말기를 거기에 별빛으로나 그대 총총 뜨기를
나희덕 시인 / 한 포기의 집
장마가 들이닥치기 전 배추를 거두려고 서두르는 손 잎을 들출 때마다 한 포기씩 뽑힐 때마다 수룩수룩 딸려나오는 목숨들, 잎부터 뿌리까지 한 틈바구니도 남기지 않고 푸른 지붕 아래 오글오글 정들어 살던 온갖 날것과 기어가는 것들이여.
한 목숨에 붙은 목숨들 이리도 많다니!
한 포기의 배추가 실은 한 채의 집이었다는 걸 안다 해도 장마 오기 전 서두르는 손들, 더 멀리 날아가는 날개들, 흙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드는 작은 발들.
나희덕 시인 / 흐린 날에는
너무 맑은 날 속으로만 걸어왔던가 습기를 견디지 못하는 마음이여 썩기도 전에 이 악취는 어디서 오는지, 바람에 나를 널어 말리지 않고는 좀더 가벼워지지 않고는 그 습한 방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바람은 칼날처럼 깊숙이, 꽂힐 때보다 빠져나갈 때 고통은 느껴졌다. 나뭇잎들은 떨어져나가지 않을 만큼만 바람에 몸을 뒤튼다. 저렇게 매달려서, 견디어야 하나 구름장 터진 사이로 잠시 드는 햇살 그러나, 아, 나는 눈부셔 바라볼 수 없다. 큰 빛을 보아버린 두 눈은 그 빛에 멀어서 더듬거려야 하고 너무 맑게만 살아온 삶은 흐린 날 속을 오래오래 걸어야 한다. 그래야 맞다, 나부끼다 못해 서로 뒤엉켜 찢겨지고 있는 저 잎새의 날들을 넘어야 한다.
나희덕 시인 / 흔들리는 것들
저 가볍게 나는 하루살이에게도 삶의 무게는 있어 마른 쑥풀 향기 속으로 툭 튀어오르는 메뚜기에게도 삶의 속도는 있어 코스모스 한 송이가 허리를 휘이청 하며 온몸으로 그 무게와 속도를 받아낸다. 어느 해 가을인들 온통 들리는 것 천지 아니었으랴 바람에 불려가는 저 잎새 끝에도 온기는 남아 있어 생명의 물기 한점 흐르고 있어 나는 낡은 담벼락이 되어 그 눈물을 받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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