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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기형도 시인 / 달밤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13.

기형도 시인 / 달밤

 

 

누나는 조그맣게 울었다.

그리고, 꽃씨를 뿌리면서 시집갔다.

 

봄이 가고.

우리는, 새벽마다 아스팔트 위에 도우도우새들이 쭈그려앉아

채송화를 싹뚝싹뚝 뜯어먹는 것을 보고 울었다.

맨홀 뚜껑은 항상 열려 있었지만

새들은 엇갈려 짚는 다리를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다.

 

여름이 가고.

바람은, 먼 南國(남국)나라까지 차가운 머리카락을 갈기갈기풀어 날렸다.

이쁜 달[月]이 노랗게 곪은 저녁,

리어카를 끌고 新作路를 걸어오시던 어머니의 그림자는

달빛을 받아 긴 띠를 발목에 매고, 그날 밤 내내

몹시 허리를 앓았다.

 

 


 

 

기형도 시인 / 봄날은 간다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熱風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반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人事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小邑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宿醉는 몇 장 紙錢 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

 

 


 

 

기형도 시인 / 아이야 어디서 너는

 

 

아이야, 어디서 너는 온몸 가득 비[雨]를 적시고

왔느냐. 네 알몸 위로 수천의 江물이 흐른다. 찬

가슴팍 위로 저 世上을 向한 江이 흐른다.

 

갈밭을 헤치고 왔니. 네 머리카락에 걸린 하얀 갈꽃이

누운 채로 젖어 있다. 그 갈꽃 무너지는 西山을 아비는

네 몸만큼의 짠 빗물을 뿌리며 넘어갔더란다. 아이야

아비의 그 구름을 먹고 왔느냐.

 

호롱을 켜려무나. 뿌옇게 몰려오는 소나기를 가득 담고

어둠 속을 흐르는, 네 눈을 켜려무나. 하늘에 실노을이

西行하고 어른거리는 불빛은 꽃을 쫓는다.

 

닦아도닦아도 흐르는 꽃술[花酒] 같은 네 江물.

갈꽃은 붉게붉게 익어가는데, 아이야 네 눈 가득

아비가 젖어 있구나.

 

 


 

 

기형도 시인 / 쥐불놀이

 

 

어른이 돌려도 됩니까?

돌려도 됩니까 어른이?

 

사랑을 목발질하며

나는 살아왔구나

대보름의 달이여

올해는 정말 멋진 연애를 해야겠습니다

모두가 불 속에 숨어 있는걸요?

돌리세요,나뭇가지

사이에 숨은 꿩을 위해

돌리세요,술래

는 잠을 자고 있어요

헛간 마른 짚 속에서

대보름의 달이여

온 동네를 뒤지고도 또

어디까지?

 

아저씨는 불이 무섭지 않으셔요?

 

 


 

기형도[奇亨度, 1960.2.16 ~ 1989.3.7]  시인

1960년 경기도 연평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1984년 중앙일보사에 입사. 정치부, 문화부, 편집부 등에서 근무.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되어 등단. 구체적 이미지들을 통해 우울한 자신의 과거 체험과 추상적 관념들을 독특하게 표현하는 시를 썼다. 1989년 서울 종로의 심야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사망. 유고시집으로 시집 『입속의 검은 입』(문학과지성사 1989)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