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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 / 나 한때
나 한때 잎새였다
지금도 가끔은 잎새
해 스치는 세포마다 말들 태어나 온 우주가 노래 노래부르고
잎새는 새들 속에 또 물방울 속에 가없는 시간의 무늬 그리며 나 태어난다고 끊임없이 노래부르고 노래부른다
지금도 신실하고 웅숭스런 무궁한 나의 삶
내 귓속에 내 핏줄 속에 울리는 우주의 시간
나 한때 잎새였다
지금도 가끔은 잎새
잊었는가 잎새가 나를 먹이고 물방울이 나를 키우고 새들이 나를 기르는 것
잊었는가 나 오늘도 잎새 속에서
뚫어져라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는 것.
김지하 시인 / 나그네
길 너머 저편에 아무것도 없다
가야 한다 나그네는 가는 것 길에서 죽는 것
길 너머 저편에 고향 없다
내 고향은 길 끝없는 하얀 길
길가에 한 송이 씀바귀 피었다.
김지하 시인 / 나이
바람은 풍덩풍덩 불고 햇볕은 사뭇 초봄인데 매지리 못가에 앉으니 괴로움도 기쁨도 자취 없고 파문 자취만 물 위에 남는다 이울어진 함석집 한 귀퉁이 늦은 탈곡이 한창인데 나는 항상 구경꾼 나는 항상 여행자 내 속에서도 늦은 탈곡이 한창인데
김지하 시인 / 낮선 희망
내리는 비를 타고 한없이 내려라
증발의 날을 기다림도 없이
내려라 내린 속에 떠오르는
첫 무지개
태양도 없이 떠오르는 비 오는 날의 낯선 낯선 희망
김지하 시인 / 단시(短詩)
短詩 하나
끊으려면 잇는 법 아주 잊히기 위해 이리 우뚝 선다 이루지 못하고 가는 것이 사람이라 오늘 진지하게 죽음을 한번 생각한다.
短詩 둘
내 가슴에 달이 들어 내 가난한 가슴에 보름달이 들어 고층 아파트 사이사이를 산책 가는 내 가슴에 가을달이 들어.
短詩 넷
진종일 바람 불고 바람 속에 꽃 피고 꽃 속에 내 그리움 피어 세계는 잠시도 멈추지 않는데 내 어쩌다 먼 산 바라 여기에 굳어 돌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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