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지하 시인 / 나 한때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27.

김지하 시인 / 나 한때

 

 

나 한때

잎새였다

 

지금도

가끔은 잎새

 

해 스치는 세포마다

말들 태어나

온 우주가 노래 노래부르고

 

잎새는 새들 속에

또 물방울 속에

가없는 시간의 무늬 그리며

나 태어난다고

끊임없이 노래부르고 노래부른다

 

지금도

신실하고 웅숭스런

무궁한 나의 삶

 

내 귓속에

내 핏줄 속에 울리는

우주의 시간

 

나 한때

잎새였다

 

지금도

가끔은 잎새

 

잊었는가

잎새가 나를 먹이고

물방울이 나를 키우고

새들이 나를 기르는 것

 

잊었는가

오늘도

잎새 속에서

 

뚫어져라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는 것.

 

 


 

 

김지하 시인 / 나그네

 

 

길 너머

저편에

아무것도 없다

 

가야 한다

나그네는 가는 것

길에서 죽는 것

 

길 너머

저편에

고향 없다

 

내 고향은

끝없는 하얀 길

 

길가에 한 송이

씀바귀

피었다.

 

 


 

 

김지하 시인 / 나이

 

 

바람은 풍덩풍덩 불고

햇볕은 사뭇 초봄인데

매지리 못가에 앉으니

괴로움도 기쁨도 자취 없고

파문 자취만 물 위에 남는다

이울어진 함석집 한 귀퉁이

늦은 탈곡이 한창인데

나는 항상 구경꾼

나는 항상 여행자

내 속에서도 늦은 탈곡이 한창인데

 

 


 

 

김지하 시인 / 낮선 희망

 

 

내리는 비를 타고

한없이 내려라

 

증발의 날을

기다림도 없이

 

내려라

내린 속에 떠오르는

 

첫 무지개

 

태양도 없이 떠오르는

비 오는 날의

낯선 낯선 희망

 

 


 

 

김지하 시인 / 단시(短詩)

 

 

短詩 하나

 

끊으려면 잇는 법

아주 잊히기 위해

이리 우뚝 선다

이루지 못하고 가는 것이 사람이라

오늘

진지하게

죽음을 한번 생각한다.

 

短詩 둘

 

내 가슴에 달이 들어

내 가난한 가슴에

보름달이 들어

고층 아파트 사이사이를

산책 가는 내 가슴에

가을달이 들어.

 

短詩 넷

 

진종일 바람 불고

바람 속에 꽃 피고

꽃 속에 내 그리움 피어

세계는 잠시도 멈추지 않는데

내 어쩌다 먼 산 바라

여기에 굳어 돌이 되었나.

 

 


 

김지하(金芝河, 1941~) 시인

1941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 1969년 『시인』지에 「황톳길」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는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애린』, 『검은산 하얀 방』, 『이 가문 날의 비구름』, 『별밭을 우러르며』, 『중심의 괴로움』, 『화개』 등이 있고, 『밥』, 『남녘땅 뱃노래』, 『살림』, 『생명』, 『생명과 자치』, 『사상기행』, 『예감에 가득 찬 숲그늘』, 『옛 가야에서 띄우는 겨울편지』, 대설(大說)『남』, 『김지하 사상전집 (전3권)』, 『김지하의 화두』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 회의 로터스 특별상(1975),  국제시인회의 위대한 시인상 (1981), 크라이스키 인권상(1981) 등과 이산문학상 (1993), 정지용문학상 (2002), 만해문학상(2002), 대산문학상(2002)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