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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영옥 시인 / 이유도 없이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27.

한영옥 시인 / 이유도 없이

 

 

  무심한 듯 유심한 듯 그럭저럭 오고 가던 말들이

  보폭이 알맞아 징검다리 같다고 여겼던 말들이

  제 무게를 갑자기 주장하며 튀어 오르는 충격에

  고스란히 얻어맞고 돌아오던 그날 마을버스 안에서

  멍하여 이웃의 인사도 못 받고 나쁜 인상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와 누웠으나 의식은 멍들어 흐르지 못했다

  오고 갔던 말들이 모래처럼 쏟아지며 들끓는 통에

  장맛비가 쏟아지는 줄도 모르고 집밖으로 피했다가

  빗줄기에 또 얻어맞아야했던 무참한 멍석말이의 밤

  그렇게 갑자기 도진 그날은 이후로 고질병이 되었다

  말도 사람도 두들기다 흩어질 뿐이었다, 그 후로는.

 

웹진 『시인광장』 2012년 12월호 발표

 

 


 

한영옥 시인

1950년 서울에서 출생. 성신여대 및 성균관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7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적극적 마술의 노래』, 『처음을 위한 춤』, 『안개편지』 등이 있음.  1997년 한국예술비평가상, 2000년 천상병시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