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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일남 시인 / 이발소에서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27.

정일남 시인 / 이발소에서

 

 

  예리한 칼을 든 사나이에게

  하나 뿐인 모가지를 맡긴다

 

  믿을 세상이 이발소 안에 있다

  비누를 문대 뭉게구름을 만들어 목에 슬슬 문댄다

 

  사나이는 능숙한 칼솜씨로 구름을 밀어낸다

  모가지서 걷혀진 구름이 땅에 뚝 떨어진다

  나는 구름 위에 떠서 노근한 잠에 빠져든다

 

  세상모르게 잠의 감미로운 도취에 한 세기를 보낸 것 같다

 

  내가 시를 쓰는 서투른 음객임을 사나이는 알 턱이 없다

  내 신분이 드러날까 두렵다

  사나이는 머리카락을 정교하게 다듬는 예술가

  나는 난잡하고 불필요한 언어를 제거할 가위를 갖지 못했다

  늘 이발소에 와서 느낀다

  시를 들고 이발소에 와야 했는데 늘 이발소에 와서 후회한다

 

  사나이는 구만 개의 머리카락을 다듬는 예술가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이 거울 속에 잘 보인다

 

  나도 시에서 언어의 구두쇠가 되어야 겠다

 

웹진 『시인광장』 2012년 12월호 발표

 

 


 

정일남 시인

삼척에서 출생. 1970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어느 갱 속에서』(1985), 『들풀의 저항』(1991), 『기차가 해변으로 간다』(1997), 『야윈손이 낙엽을 줍네』(2000), 『추일풍경』(2004), 『유배지로 가는길』(2005), 『훈장』(2012) 등이 있음. 2007년 한국시인정신상 수상. 2009년 천강문학상 수상.